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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Feb 04. 2023

늦은 회신

겨울 단상

늦은 회신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당신을 걱정할 여력이 생겨 조심스레 안부를 건넵니다. 가엽게도 저는 그리 평안치 못했습니다. 탓에 미루고 미루던 안부를 이제야 전하는 것이에요. 다 알고 계실 텐데 서면으로 적어야만 하는 것이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쑥스럽습니다. 쓰는 일이란 이렇듯 겉과 속이 따로 도는 것을 살살 엮어서 잠시 고정해두는 일이겠지요. 무거운 분위기가 되는 게 싫어 꾸중이라도 듣자는 마음에 경박하게 인사를 건네는 걸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제야 글을 편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려 더는 믿지 않으실 테지만 말이에요. 시나브로 철이 들어서 뭇 작가들처럼 재미없는 짓을 하게 됐다거나, 거창하게 말하기를 즐기는 아무개 시인의 말마따나 인과의 흐름에 쓸려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편집증이 심한 처량한 꼴로 무어가 편해졌냐 하시겠지마는 마음만은 넉넉히 편안해졌습니다. 짓궂은 면이 많은 제가 대놓고 속내를 털어놓으면 의심부터 하시니 어떻게 전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는데, 역시 있는 그대로 옮겨 적는 게 가장 효과적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고운 언어와 데면스럽고 보이는 것을 비틀어 비명을 듣는 걸 좋아하는 듯합니다. 눌렀다 펴지며 숨을 몰아 내쉬듯 다시 원점으로 오는 일이 언뜻 무가치해 보여도 제겐 평화에 한없이 가까운 과정이에요. 별난 녀석이 나름의 방법을 찾았구나 하며 귀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냥 웃으며 말하기엔 심심한 고생스러운 날도 있었습니다. 작년 겨울 무렵엔 스트레스를 받아 정수리에 새치가 몇 가닥 나기도 했고요. 고양이들에게 난 하얀 털을 똑똑이 털이라고 부르던데 저도 조금은 똑똑해졌다면 좋겠군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찾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의사가 내시경이니 혈액검사니 검사란 검사는 닥치는 대로 해놓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 뭐예요.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며 마음은 놓였습니다만 사탕을 먹는 것과 무어 다를까 싶기도 했습니다. 모든 게 저의 불찰로 품어 키운 새싹이라 생각하면 아프긴 해도 답답증은 조금 사라집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애써 타인을 미워할 거 없겠습니다. 자신도 타인으로 여기는 제겐 더없이 중요한 일이겠죠. 어차피 삶은 타인이 구원할 수 없는 기나긴 여정이니 적당히 눈을 흘기고 내 다리가 안 아플 정도로 걷어차고 갈 길을 가면 그만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 제가 쓴 글 읽으며 기분 좋게 웃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건 저를 보던 선생님의 모습과 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으니 풋내도 애정하고 마는 것이겠죠. 하나 그것과 별개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한결같이 많은 용기가 필요한 거 같습니다. 그럴 때는 허공에 대고 욕이라도 뱉어 보라셨는데 이젠 어른이라 불려야 하는 낯뜨거운 입장 탓에 용기 내기가 쉽지 않네요. 혹여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앞으로 그림을 그려볼까 싶습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따금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어서요. 침묵하지 않을 책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 볼까 싶습니다. 온점 하나 찍어놓고 당당한 낯짝으로 깊은 사유를 설득할 입장은 아니어도 말없이 전하고픈 이야기가 몇 있습니다. 절필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숨어서 글 쓰는 이가 쓰는 일 멈춘다고 하여 그게 뭐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대단한 결심 같은 거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무어든 즐겁게 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는 걸까 싶은 고민이 생기면 그 고민마저 즐거이 하고 싶습니다. 잘하고 있는지. 어딘가에서 중요한 것을 놓아버린 게 아닌지. 때때론 뒤돌아서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다가 울음 터트리고 싶습니다. 주저앉아 몇 날 며칠이고 후회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좋겠습니다. 이 또한 너그럽게 볼 수 있게 된다면 바랄 게 없겠어요.     


날이 푹해지니 봄나물 필 무렵엔 둑방의 흙이 물러 냄새가 좋다 하시던 게 떠오르네요. 머잖아 봄이 올 겁니다. 그러니 겨울을 잘 보내어 줍시다. 이따금 글을 보내어드릴 터이니 애쓰고 있구나 하시며 지켜봐 주세요.     

23년 겨울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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