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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Feb 22. 2023

뻘밭, 광란의 댄스.

겨울 단상

ㆍ뻘밭, 광란의 댄스.



삶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에는 너무 힘든 날이었다. 이렇다 할 이유 없는 피로에 짓눌리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런 날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 거다.


“우린 관성에 의해 걸어왔던 거뿐이야. 어차피 예쁜 달빛이 쏟아지는 뻘밭에서 춤을 추는 좀비 떼라고!”


관절을 꺾으며 제 꼴을 뽐내던 앞집 남자가 소리쳤다. 오, 상냥하게도 외로운 나를 위해 밤낮으로 불을 켜두던 그 사람이다.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평범해서 내일이면 잊을 거 같은 그의 얼굴은 침으로 범벅되어 있다. 그토록 즐거울 일인가 싶어 어울려 볼까 하다가 창백한 월광 아래서도 누렇게 떠 있는 그의 안색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아래층 식당에서 키우는 개에 물려서 병이 걸린 건 아닐까. 그래서 달빛을 보고 개처럼 짖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에 하나 예측이 맞으면 저 사람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텐데. 행여 침이 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생각을 비워. 그냥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현실을 즐기라고. 춤이나 춰.”


그가 말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맞는 말이라 고개만 끄덕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진지하게 구는 놈이 미친놈인 거다. 여긴 물도 뭍도 없으니 어떤 수사로도 상쇄되지 않는 상실감은 좀비 떼의 흥을 돋우기 충분했다. 그러니 저렇게 넋 나간 놈들처럼 흐느적대며 춤을 추는 거겠지.


낙원. 나는 이 추악한 광경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주변엔 모두 이성을 잃은 좀비 놈들뿐이고 진흙에 발이나 머리가 처박혀서 꿈틀대는 게 고작이다. 나처럼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잔뜩 흥분해서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서서히 갯벌에 파묻히고 있다. 지구상에 이보다 완벽한 곳이 있을까.


“나는 도시에 진흙이 밀려들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렸어요.”


“아, 그래?”


앞집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이내 달빛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게만 들리지 않는 노래라도 흘러나오는 건지 다들 몸을 움찔대며 리듬을 탔다. 어울리지 못하는 게 한탄스럽기도 했으나 잠깐뿐이었다. 머잖아 허리까지 갯벌에 파묻힌 놈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들려왔는데, 아직 멀쩡한 놈들은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고 까르르 웃기 바빴다. 광경을 보니 웃음이 삐죽삐죽 나왔지만, 꼴들이 한심해 이마저 금세 식었다.


“이만 갈게요. 장화를 잃어버렸거든요. 친한 친구가 선물해 준 장화인데…. 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아 허공에 혼잣말한 꼴이 됐다. 왠지 모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다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결국, 다 죽고 말 거야.’


정신이 든 나는 서둘러 거기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두려움이 몸을 누를수록 깊게 발이 빠졌는데, 푹 파였다가 메워지는 구멍 속에 수치심을 떨어내며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으로 걷고 또 걸었다. 이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으니 곧 익숙해졌다. 잠을 못 자서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이내 발에 날개가 달린 듯 걷고 있었다. 나는 살 것이다. 수평선이 차오르는 것을 보니 좀비 떼는 2시간 후면 다 죽을 것이다.



발가락 사이에 사박사박 모래 소리가 들리기에 뒤돌아봤더니, 달이 작아지고 노란색 장화 한 짝을 들고 웃는 내 모습이 보인다. 먼동인지 좀비 떼인 지 모를 것들이 뻘밭 위에 자글자글하다가 이내 하나의 네모난 빛에 삼켜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창 너머에 좀비에게 인사를 건넸다. 녀석들은 상실감을 씻어내려 광란의 축제를 즐기고 있으리라. 이미 밤은 깊었고 찬 공기가 밀려들어 옴짝달싹할 수 없으니 더 나은 선택은 없겠지. 건너편 아파트에 몇 개의 창문이 요란하게 발광한다. 나는 담요 한 장 걸치고서 그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벽걸이 TV 속 좀비들의 춤사위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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