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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Nov 16. 2023

마음에 사람 있네

겨울 단상

마음에 사람 있네



***


키리에, 너무 느린 태엽 시계 맞춰지긴 하나요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돌아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고독이라뇨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고장 난 거예요


장마가 길었던 여름 그때쯤이 틀림없어



기억해요 문을 쩍 가르고 남의 침대에 누워서는 시트 끝단에 검댕을 잔뜩 묻히던 천진한 낯짝과 장맛비를 헤엄치며 정원과 골목 누비던 퍼런 손등도 전부. 추락하는 비와 증발하는 사랑이 부딪쳐 뿌옇게 사라지는 순간은 정말 멋지지 않던가요


은색 거울 부서지고 검붉은 뒷면에 적힌 글씨 작아 눈이 시리기에 여름은 비로소 다정합니다. 밤 깊은데 끝끝내 테라스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시나요 난 정말 모르겠어 추워요 추워 찢어진 블라우스를 꿰매드릴게요



며칠 전부터 갈비뼈 사이가 뻐근해요 의사는 현대사회에 스트레스가 큰 문제라고 했습니다. 작게 변한 사람이 가슴팍 어디에 걸린 거 아닌가요 아니면 대상 없는 상사병 같은 거. 가엾은 목구멍에도 가슴팍에도 어디에도 소인은 없다는데 날 미치광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신경 쓰지 말고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쓰러지고 밤을 보지 말라며 약을 잔뜩 챙겨 줬고 확신은 없으니 또 보자고 했습니다. 난 대답도 없이 문을 쾅 닫고 나왔어요. 화난 건 아녔습니다 미친 사람에게 건네는 다정함은 몹시 뜨거우니 거스러미 일은 돌덩이 마음에 불붙을까 봐서 그 불티가 사람들 태울까 봐서 두려운 까닭이죠



고맙지만 됐어요 그 말들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맨 목에 넘긴 소인을 토해내려고 약을 잔뜩 먹이고 손으로 목을 조르기도 했어요 켁켁대며 켁켁대며 인제 그만 나오라고


거기 누구 있다면 죽여야 하겠으니


아니, 늦어서 소용없겠다니요


지옥에서조차 죽음의 미학은 그리도 까다롭답니까


어쩜 얼굴 여기저기 금 간 꼴이 이따위로 살 테니 상관 말라는 악다구니 같아 이미 죽었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장마 끝나고 남은 빨간 웅덩이 염화칼슘 암회색 눈 무더기 갈잎 눈물 민물고기 잔뜩 퍼다가 베개에 부었습니다. 미움도 함께 쏟았으니 이제 그만 목구멍에 달라붙은 네 얼굴 좀 보면 좋겠습니다


죽기 전에야 입으로 나와 나를 볼까



오 사랑스러운 지난밤 목구멍을 넘는 신물을 혀로 누르며 깼어요. 그리운 밤 계절의 원혼들 바스락대는 단풍잎 겨울 하얀 장탄식 벨벳처럼 부드러운 은하수 커다란 별 블러드문


사랑 뭐냐고 물으면 어두운 하늘 뒤에 숨은 별 가리키는 거로 답 대신하겠어요


짙은 녹음에 갇혀 눈이 먼대도 아픔만 좋아하는 광인처럼 보여도 좋으니 겨우내 어른 슬픔 껴안고 이리저리 터져 나오는 마음들 핥게요


우리 꼭 찐득한 마음 늘어진 밤하늘도 봅시다


별─ 달- 짙은 머리칼 뇌쇄한 마음 그런데 꼭 사랑으로 불려야 할까 소유에 관한 집요한 농담은 어떻겠어요 무슨 일 있어도 내가 사랑한다는 건 기억해줘


너는 이맘 잠시라도 나무 밑동에 묶어 두고 싶고 나는 돌 매달아 영원한 유폐를 계획하니 우리 영락없이 여름날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꼴입니다. 주인 없이 널브러진 밑동들 꽝꽝 얼어 핏기 하나 없는 물웅덩이 애착의 흔적. 익사인지 동사인지 우린 악살박살이 나버린 여름에 살기 위해 견디는 걸지. 지옥에서 떠낸 달차근한 새벽 멈춘 태엽장치 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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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6퇴고


-그림:문화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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