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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 2021 | 문학동네

두 세계, 세 사람의 역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by 정대영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 2021 | 문학동네


2014년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었을 때, 한강 작가는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고 깊이 감정이입을 하는 듯했는데, 그 이유는 본인의 과거와 경험을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경험에 연결시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그러한 글쓰기가 좀 더 직접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가 은연중에 주인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더 담아, 마치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이는 ‘한강’이라는 작가 자신이며, 2014년 어떤 소설(『소년이 온다』?)을 썼던 주인공 ‘경하’였고, 책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책 안에 있었다.


이런 글쓰기는 독자로 하여금 책 안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는 듯하다.


작가가 두 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글에 등장하는 새와 눈은 또 다른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다. 이질적인 것을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눈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준다. 차가운 듯하지만 닿는 순간에는 차갑지 않고, 무거워 보일 정도로 크지만 감당하지 못할 무게로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가볍기만 하다. 새도 가벼운 존재다. 가볍게 날아오르고 가볍게 내려앉는다. 어깨에 내려앉으면 발톱이 살을 파고들 것 같지만, 아픔을 느끼거나 상처를 남길 정도는 아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새장에 들어가 어두워지면 바로 죽은 듯 고요하게 잠들기도 한다. 두 개의 눈으로 독립적인 두 세상을 보는 새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를 연결시킨다.


죽었지만 다시 돌아오는 새는, 삶과 죽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을 연결시킨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새. 그림자는 남기지만 실체는 분명하지 않은 새. 그 새가 날아올라 두 세계를 연결시킨다. 이 지점에서, 경하와 인선이 그 두 세계 중 어느 곳에 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두 세계가 연결된 그곳은 이미 ‘사실’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감정과 공감이다. 인선의 감정이, 어머니의 감정이, 아버지와 외삼촌의 감정이 경하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감이 전달되는 것이다.


‘아마’를 보내며 눈물을 흘리는,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의 상처를 보듬기보다 정성 들여 새를 보내주며 눈물을 흘리는 경하가,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던 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이 소설의 변곡점이 아닐까? ‘안 된다고 할까’, ‘돌아갈까’를 고민하던 현실의 경하가, 새를 사랑하고 새를 통해 생사의 경계를 경험해 왔던 인선을 공감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 책은 죽음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나뉘어 살아가는 이들이 작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을 담고 있다. 그 감정은 사랑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책이 사랑을 담은 책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별은 했으나 작별은 하지 않는다. 생과 사로 나뉘었지만 작별의 인사를 하고 헤어지지는 않는다. ‘작별하지 못했다’거나 ‘작별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아픈 역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의지, 그들을 공감하는 이들의 의지, 작가의 의지, 그리고 독자들의 의지가 담긴 제목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소년이 온다』가 아버지의 이야기였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너무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자세히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이 책은 나에게 그 세계로 통하게 해주는 문을 열어주는 열쇠 같고,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는 매개체 같은 역할을 해준 듯하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한동안 모르고 살았던, 또는 모른 척했던 이야기. 아빠와 할아버지의 이야기. 정확히 알 수 없어도, 그리고 조금은 아프고 불편해도, 그 이야기를 찾고, 듣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 써 내려가야 한다.


내 삶의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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