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무게 중심을 옮기다
바야흐로 AI 시대다. 이제는 누구나 AI에게 묻고, 답을 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가장 높은 수준의 frontier 연구를 수행하는 세계적인 석학들도, 초단위로 자금이 오가는 금융시장 속 전문가들도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과제, 논문, 이메일, 심지어 자기소개서까지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 변화 속에서 대학 교수자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에세이를 써오라고 하는 게 여전히 효과가 있을까요?"
"AI를 활용한 듯한 훌륭한 과제와, 스스로 쓴 듯하지만 미흡한 과제 중 어떤 것에 더 높은 점수를 줘야 할까요?"
"Online quiz를 내면 다 GPT에 물어볼 텐데, 의미가 있을까요?"
"수학 문제도 이제 AI가 꽤 잘 푸는데, problem set을 내주는 게 여전히 필요할까요?"
나 역시 수번이나 이런 질문을 동료 교수님들과 주고받았다.
배움의 태도와 교수의 역할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내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다. "공부할 친구는 알아서 공부하고, 공부 안 할 친구는 어떻게 해도 안 한다."
이 말은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대학 교육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다. 대학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니다. 수준 높은 정보를 스스로 탐색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지식을 자기화하는 훈련의 장이다.
그렇기에 교수자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에서 '탐구를 설계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생이 이미 AI를 통해 빠르게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교수자는 '정답'이 아닌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문제의 핵심을 짚고, 답의 타당성을 검증하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류를 스스로 식별하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현대 대학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단순 문제풀이의 시대는 끝났다
단순한 문제풀이를 시키고, 그에 대한 정답을 찾게 하는 것은 이제 큰 의미가 없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갈 시기에는 단순 작업, 단순 문제풀이, 단순 계산, 단순 답찾기는 이미 AI,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혹은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가 대체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과정을 왜 거쳐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가 달성하려는 목표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를 위해 선택한 방법론이 적합한지를 비판적으로 고민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사실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가치에 대한 고민이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의 탐색이다. 다시 말해, open-end question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각자의 사고를 전개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LLM에 물어보더라도 그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토론하고 비교하며 스스로 사고해야 한다.
교수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질문을 만들고 내는 연습이다. 단순 기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학생들이 기술을 통해 어떤 철학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야 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가치관과 철학 위에서 다루느냐 하는 문제다.
AI와 함께 배우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AI를 사용하지 않고 정답을 습득하는 법"이 아니라 "AI를 사용하면서 문제를 고민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AI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교육이다. 마치 2000년대에 인터넷 없이 자료를 찾으라고 하거나, 1990년대에 컴퓨터 없이 보고서를 쓰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도구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통해 사고의 깊이를 확장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AI가 제시하는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왜 이런 답이 나왔는가'를 묻고, '다른 관점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실험해보는 학습 방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학생이 GPT에게 물어본 답변을 단순히 제출하는 대신, 그 답변의 근거를 분석하고, 오류나 환각(hallucination)을 찾아내는 과정을 평가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AI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더 나은 인간적 사고를 설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답에서 정답을 구별해내는 법'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정답이 정해진 계산형 문제나 단답형 객관식 문제는 이제 표면적인 문제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분석하고,
'그럴듯하지만 진실을 왜곡하거나 논리적 비약이 있는 부분'을 찾아내며, 그것이 왜 문제인지 고민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새로운 평가의 기준
AI 시대의 교육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평가다. AI의 도움을 받은 과제를 '부정행위'로 볼 수는 없지만, 무비판적으로 복사/붙여넣기한 결과물을 그대로 인정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가의 초점을 '결과물'에서 '과정'으로 옮겨야 한다. 학생이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판단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AI의 답변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정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또한 협업과 토론, 비판적 글쓰기, 실제 문제 해결 중심의 프로젝트형 수업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AI가 반복적 작업을 대신함으로써 교수자는 학생의 사고 과정과 토론 능력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AI로부터 배우기'의 시대
AI는 인간의 지식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를 자극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학의 교육 목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학생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며, 그 지식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책임 있게 사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AI는 그 목표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목표에 더 빨리 다가갈 수 있는 도구다. 문제는 우리가 AI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교육의 본질은 도구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그리고 교수자는 여전히 그 '사람다움'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