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세기 2장
성경의 창세기 2장을 읽는다.
2장에서 신은 에덴을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여 에덴의 정원에 둔다. 사람의 본래 탄생 목적은 땅을 돌보고 지키는 일꾼. 신의 모습으로 만들되 흙으로 지어 콧구멍에 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 있는 자 되었다.
땅을 재료로 사람을 지었으니, 우리는 땅의 일부. 땅을 돌봄은 제 몸을 돌보는 것. 그리고 제 몸 돌보듯 땅을 돌보는 것이 사람이 땅과 관계 맺는 타고난 업, 즉 천직 아니겠나.
2장에는 에덴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에덴에서 나와 에덴의 정원을 적시고 흐르는 물줄기는 4개의 강이 된다.
"사람아,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라 하는데 그 물은 금이 있는 땅을 둘러 흐른단다. 둘째 강은 기혼, 셋째 강은..."
신이 천지 아무것도 모르는 최초의 사람에게 친히 에덴을 안내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경호'.
경호는 예전 한국에서 내가 영어 강사로 가르치던 어린 학생이었다.
"Teacher, Australia what animal?"
(쌤, 호주에는 어떤 동물이 사나요?)
"Kangaroos, koalas, wombats, crocodiles..."
(캥거루, 코알라, 웜벳, 악어...)
"Wooah! How look?"
(우와! 어떻게 생겼어요?)
"Have you seen sleepy koalas? They sleep like this on the tree."
(잠자는 코알라 본 적 있니? 나무에서 이렇게 잔다?)
경호의 콩글리쉬와 감탄에 맞춰 나는 춤을 췄다. 나무에서 엉덩이를 긁는 코알라가 되었다가 캥거루가 되어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접고 아이들과 함께 폴짝폴짝.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과 천진하고 맑은 경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웬걸. 덜컥. 겁이 났다.
'내가 하는 말이 이 아이의 세상이 되는구나.'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는 백지장이자 고스란히 흡수하는 스펀지.
그날 그 자리에서 가슴 한가운데 딱 한마디 떠올랐다.
'정말 잘 가르치고 싶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책임감으로 빚어진 순간이랄까.
성경으로 돌아가, 신이 만든 에덴의 정원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에게 그곳 모든 나무 열매를 다 먹어도 지식나무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 금하신다. 먹으면 죽는다 하였으니...
그러게. 호주의 악어도 건드리면 물려 죽을 각오하고, 캥거루도 잘못 건드리면 뒷발에 차여 장파열될 각오를 해야 한다.
실제 아이들이 악어와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위험에 대비해 미리 아이에게 경고해야 할 책임이 보호자에게 있다. 그런 사랑과 책임감의 지혜는 사람의 보호자인 신에게서 왔으리. 자신의 모습으로 만든 존재를 얼마나 소중히 가르치고 싶었을까.
창세기의 신은 창세부터 선악이 있음을 사람에게 투명하게 알린다. 행동에는 책임이 있음을 가르친다. 책임의 대가가 죽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곧 신은 사람과 함께 일할 조력자인 여자를 만들어 그 곁에 두신다. 그리고 창세기 2장 마지막절,
'사람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더라.'
벌거벗음이란 숨기지 않고 드러냄 또 드러남. 진실되고 투명함이라고도 본다. 그리고 떳떳함. 즉 죄짓지 않았음. (벗고도 거짓을 떠들어대는 사우나에 앉았는 사람 같지 않았던 것이다.)
신도 사람 앞에 벌거벗었으리라.
자신의 모습을 한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은 존재에 책임을 지고 제 모습 돌보듯 사람을 돌보는 것, 그것이 신이 가진 보호자의 숙명. 그 숙명을 스스로 받듦으로 사람 앞에 솔직하였으리라.
오늘 창세기 2장 읽으며 투명하게 벗은 신을 마주한다. 최초의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자신 앞에 벌거벗고 에덴을 소개하는 창조자를 들여다 보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땅을 밟으며, 그의 숨을 콧구멍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며. 지금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