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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Aug 19. 2023

아이고, 인간아

[성경] 창세기 3장




성경 창세기 3장을 읽는다.

에덴에는 뱀이 등장하여 최초의 사람 아담의 부인인 이브를 꼬드긴다.

'선악과'라는, 먹으면 죽는다고 신이 금한 과일을 취해도 죽기는커녕 신과 같은 선악의 지혜에 눈뜨게 되노라고 혀를 놀리면서 말이다. 뱀의 말에 넘어간 이브는 결국 지혜를 탐하여 선악과에 입을 댄다. 곁에 있던 아담도 함께 먹어 둘은 곧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에 눈을 뜨고 무화과 잎을 엮어 몸을 가리고 숨는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잘못, 감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신이 곧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을 취했음을 알고는 자초지종을 묻는다. 아담이 이르기를,

"'당신(신)'이 제게 붙여준 '여자(이브)'가 줘서 과일을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브가 이르기를,

"'뱀'이 꼬드겨서 먹었습니다."

그들 말이 사실이나, 신의 경고를 알고도 자신의 탐, 즉 자기 자신을 신 앞에 세워 금과 먹기를 선택하고 행동에 옮긴 것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번에는 비난과 책망 뒤에 숨고 있다.

신은 진노한다. 그리고 신의 저주가 떨어진다.

"뱀, 너는 이제 기어 다니며 평생 흙이나 먹고 여자와는 대대손손 원수가 되리라."

"여자, 너는 산고를 겪고 남편의 지배를 받으리."

"아담, 너는 내 말 대신 여자 말 듣기로 하였으니 너로 인해 내 땅까지 저주하리라. 죽을 때까지 땅에서 고되게 노동하여야 밥 먹을 것이며 흙에서 난 자로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

그리고는 신이 손수 옷을 지어 둘을 입히고는 에덴의 정원에서 추방하여 땅으로 일하러 내보낸다.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신은 그들이 선악의 지식을 취했듯 생명나무 열매도 취하여 신처럼 영생할까 봐 그제야 생명나무 닿는 길을 경호토록 한다.


아이고, 인간아.

창세기 3장을 읽고 나니 절로 터지는 말이다. '그 노무 인간'의 시초가 창세에 우리 최고 조상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신의 말을 안 듣고 여자 말 듣기로, 신의 말 안 듣고 뱀 말을 듣기로, 아니 신의 말 안 듣고 자기 자신의 욕망의 말 듣기로.

그 선악과라는 것이 지식 나무의 과일의 형태로 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지혜란 나무가 성장하여 열매 맺듯 경험과 지적 성장이 있어야 비로소 열매 맺는 것 아닌가. 경험치와 지적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지식, 그중에도 죽을 만큼 위험할 수 있는 지식을 취했을 때, 그 지식으로 칠 수 있는 사고를 상상해 보라. 알면 자고로 쓰는 법이니까. 어린아이가 불가지고 불장난하고 집까지만 태워도 다행이다 한다. 산 태우고 남 태우고 자신까지도 태워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는 것이기에 보호자가 기암을 토하며 막아서는 것이리라.

창세에서 만물을 지으며 모든 것의 풍요와 번영을 축복하던 축복의 신이 저주를 토해낼 만큼 무서운 지식이자, 가희 신급이라야 소화하며 다뤄낼 수 있는 지식이 바로 선과 악인 것이다. 그것이 천지 분간 못하고 빨개벗은 사람의 손에 들어갔으니, 이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굳이 성경 안 읽어도 지금 세상 돌아가는 판국을 보면 감이 올 것이다.

아이고, 인간들아.


그래도 우리는 뱀 탓을 하고 신 탓을 할 것이다.

뱀새끼... 개새끼 전에 뱀새끼가 있었으니. 세 치 혀는 놀리되 자신의 한 치 앞은 모르는 녀석. 사람 역시 금기의 지식을 혀로 쉽게 취하였고 그로부터 혀로 죄짓는 계보가 출발한다.

그리고 신. 왜 그렇게 순진하셨어요? 어디 사람이 신 같은 줄 아십니까? 하물며 뱀은요? 뭘 믿고 에덴 한가운데 떡하니 그런 중요한 나무를 두셨답니까.

신의 현타를 상상한다. 창세의 선악과 사건은 신과 사람 사이의 트라우마이다. 죄와 원망의 고리가 생겨버렸으니.


그럼에도 신은 최초의 사람이 '벗어서 숨었다'는 두려운 마음이자 선악의 지식으로 눈 뜬 마음을 인정하여 손수 옷을 지어 입히신다.

지금부터 성경 기록의 스포일러 들어간다. 스포주의!

그렇게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고 나서부터 성경은 놀랍게도 신이 사람에게 영생을 쥐어주는 반전으로 이어진다. 못 믿을 놈들, 신을 자기 뒤에 두고 여자와 뱀 뒤에 두는 녀석들, 신처럼 되면 안 되는 녀석들을 도대체 왜 신은 어떤 연유로 어떤 역사를 거치기에 자기 손으로 사람에게 영생나무 열매를 쥐어 주느냐.

그 신과 사람의 관계회복의 우여곡절이 성경 가운데 주욱 펼쳐진다.

성경에서 눈을 떼고 신이 지은 세상을 창밖으로 둘러본다. 생명 있는 것들이 모두 성장의 여정이 있다는 섭리를 보며 그것이 신에게서 탄생한 신의 섭리임을 볼 때에, 신도 어쩔 수 없이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의 여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는 것. 내가 마주하는 성경의 신은 그러하다.

에이 뭐 신이 그래?

우리는 영화나 만화, 일반 책에 등장하는 히어로와 소원들어주는 마법요정에 익숙하다. 또는 우리 상상  완벽의 환상.

성경의 신은 어쩌면 완벽의 기준을 사랑으로 잡는다.

사랑이란 완벽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 완벽지 않아도 사랑받는 것.

사랑에는 훈육도 있고, 기꺼이 성장하여 변하는 것도 있고, 후회도 있고, 잘못과 실수도 있고, 용서도 있고, 기다림도 있고, 희생도 있다.


오늘 내가 옷 입고 앉았음에

이 옷이 신이 지어 내보낸 옷임을 알고

이 옷이 신이 손수 내 허물 덮는 옷임을 알고

내 무슨 옷을 걸쳤든 자랑치 않고

무슨 옷을 입었든 감사하며

내 벌거벗음도

내 허물도

사랑하시는 신을

사랑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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