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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Aug 25. 2023

의인의 민낯

[성경] 창세기 9장




성경 창세기 9장을 읽는다.

신이 내린 홍수로 인해 부패한 인류와 지상의 모든 생명이 죽고, 노아 가족과 그들이 방주에 데리고 탔던 생물들만이 살아남는다. '의인'이라 칭호 받던 노아이기에 신이 특별히 그로 하여금 사람들이 다시 지상에서 삶의 기회를 얻도록 허락한 것이다.

신은 노아 및 그 아들들의 번영을 축사하며 지상에 모든 생물을 그들 손에 맡기니 그것들이 너희를 두려워할 것이라 하신다. 다만,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로 먹지 말라 금하신다.

"생명 있는 피의 대가는 동물이고 사람이고 치르게 할 것이다. 누구든 사람이 피 흘리게 하거든 그 사람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피를 흘리게 되리니, 이는 신의 모습으로 사람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과 세상의 생명을 깡그리 홍수라는 방식으로 쓸어버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주신다. 하늘에 무지개가 바로 그 약조의 표식이며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 온 세상에 영원토록 유효하도록 하신다.


한편,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후에 이들이 온 땅에 인류를 퍼뜨리게 된다.

어느 날 사건이 생긴다. 노아가 땅을 경작하여 얻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는 자기의 장막 안에 벌거벗고 누운 것을 아들 '함'이 보게 된다. 함이 나가서 다른 두 형제에게 말하고, 셈과 야벳이 옷을 들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몸을 가려주되 고개를 딴 데로 하고 아비의 몸을 보지 않았다.

노아가 깨어나 함에게 노발대발하여 저주하기를,

"니 아들 '가나안'(노아의 손자)을 저주하노라! 그 형제들의 노예가 될지라.

주(신)여, 가나안이 셈의 노예가 되게 하소서. 야벳의 영토를 넓히시되 야벳이 셈의 장막 안에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야벳의 종이 되게 하소서."

9장 말미에 노아는 수명을 채우고 생을 마감한다.





9장은 처음에 잘 나가다가 끝에서 '헐'이다.

그 당시 벗은 몸, 또 아비의 벗은 몸을 보는 게 얼마나 중죄인지는 모르겠으나, 또는 노아 개인적으로 벗은 몸을 노출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으나.

또는 굳이 '벗은 몸'이라는 것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원죄(신이 금한 선악과를 취해서 사람이 에덴의 정원에서 쫓겨나며 인류의 생고생이 시작된 것이자, 신과의 관계가 틀어진 일)와 그들이 금지된 선악의 지식으로 눈뜨게 된 벌거벗음을 상기시키는 인류 대대손손의 치욕'

...이라고 확대해석을 해보아도,

노아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어디까지나 사건의 발단은 자기가 술 취했기 때문인데. 물론 아들인 함의 입도 가벼웠다. 그래도 그렇지 아들의 귀한 아들을 노예가 되라고 저주하다니.


그런데, 좀 더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 노아의 화가 이해가 간다.

노아는 전인류와 생명이 전멸하는 중에 '오직 의롭다'하여 신에게 구원받았다. 그리고 지금 전멸 이후 또 다른 최초의 사람으로 생명을 퍼뜨리는 중역을 맡았으면 그가 지고 있는 '의로움'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런데 술 취하고 벌거벗은 '의롭지 않은 모습이 들킨 것'이다. 그것은 아마, 수치심을 넘은 죄책감이다. 이런 자신이 한 시대 인류의 끝이자 시작이 되었다는 의인의 죄책감.

거기다 노아는 한 술 더 떠서 자식을 저주해 버린다. 이제껏 저주는 신이, 사람이 신급의 위험한 지식을 금기를 깨고 함부로 취했을 때와 사람이 살인하였을 때 했던 것을 노아가 자신을 위해 신을 흉내 내 버린 것이다. 참으로 자신의 나체보다도 더한 민낯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전혀 의롭지 않은.

그는 선을 넘었고 죄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노아를 떠받드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노아의 방주'라는 말을 쓰면서.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신의 방주' 신이 지시하고 설계해서 노아라는 손을 빌려 지은 방주이다. 물론 반반의 공을 내었다고 쳐서 '신이 설계하고 노아가 만들어 노아가족과 생물을 신이 구원한 방주'   있겠고, 줄여서는 '생명의 방주'라고   있겠다. 방주 일이 오롯이 처음부터 끝가지 노아의 의로움으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로운 것도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서 그 '의로움의 기준'은 '신'이다. 선악을 적절히 써가며(부패한 인류를 쓸어버리는 홍수도 악이라면 악이고 선이라면 선이다) 생명을 운영하는 것이 의로움이라면 꼭 선한 것만이 의로움은 아니다. 선악의 기준이 바뀌기도 하고.

그럼 선은 무엇인가. 최소한 악은 아닌 것 아닐까? 그럼 악은? 최소한의 선을 안 지키는 것. 곧, 선 넘는 것.

선 넘다? 신이 금기하는 것을 취하는 것, 살인하는 것, 술에 취하여 이성 놓는 것, 자신에 취하는 것, 신을 함부로 흉내 내는 것, 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으로 선악의 기준 내는 것.


근데 있잖아.

나는 노아가 위로가 된다. 그네도 사람이잖아. 너무 완벽한 의인 아니고. 우리네처럼. 아직 멀었어.

그런 노아를 신은 의인이라 인정해 줬고, 의인이라고 구해줬다. 아직 갈 길 먼 사람 수준에 그만하면 생명 부지해 줄 가치와 다시금 번영을 축복해 줄 가치가 있었다.

성경에서 노아가 자식에게 내린 저주를 신이 허락했다는 말은 없다. 뒤에 형제의 운명이 꼬였다면, 적어도 사이가 틀어졌다면 그건 노아 탓이다. 아니, 사람 탓이다. 아니, 죄 탓이다. 아니 사람? 아니 죄? 아니 뱀? 아니 악? 따지지 말자. 이러면 또 신 탓까지 가는 것이 죄성이다. 우리는 신에게 선악을 지혜롭게 다룸을 배우고, 그의 의로움을 알아가는 중이므로 지금 천하의 벌거숭이로 어설프게 하는 판단은 어리석을 뿐이다.

 

끝으로, 가장 마음 깊이 읽은 오늘의 구절.

'신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하여 사람이 피 흘린 대가는 반드시 피로 치르게 하겠다.'

신이 경고한 부분이다. 무섭지 않나?

그런데 신은 나중에 '예수'라는 아들, 아마도 사람 중에 자신을 가장 닮았을 생명을 무수한 사람들 손에 피 흘리도록 두고도 그들을 살려놓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생의 축복을 준다. 사람들을 위한 신의 의로움이 나중에 그 정도로 발전한다. 선악 위에 설만 하지 않은가. 그저 막강한 사랑이려나.

앞 장까지 읽으면서는 선악 수련을 따졌는데, 이제는 신의 의로움을 따라가 볼 요량이다.


신과 사람의 엎치락 뒷치락을 여전히 하늘의 무지개가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사람뿐 아니라 온 생명을 위한 것. 오색찬란한 '신의 의' 한 자락을 머리 위에 얹고 온 생명이 이 땅에 숨 쉬고 있다.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만 세상에 기회 받은 것이 아님을, 온 생명이 신에게 공평하게 받은 생명의 기회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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