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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ug 09. 2020

완벽하지 않은 사람

틈을 보이는 것이 뭐 어때서

나는 완벽주의자다. 우와~! 이렇게 대 놓고 쓰고 보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완벽주의자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허술함이 지금도 매 순간 보이는 와중에 이렇게 자신 있게 완벽주의자라고 말하다니. 뻔뻔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이다. 타고난 기질도 그랬겠거니와 살아온 삶도 완벽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점은 내가 완벽주의자라는 것이지,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중학교 때 일이다. 나는 미술 실력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림 그리고 만드는 시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보니 만드는 것에 별로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첫 미술 수업. 고무 판화를 하는 날이었다.(20년이 훌쩍 지나지만 잊히지가 않는다.) 고무판에 밑그림을 그리고 음각인지 양각인지 조각칼로 파내어 판화를 찍어내는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과제만 내어주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당시 선생님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전시회도 여는 본업이 예술가라고 말하고 다니셨다.) 나는 달 표면이라 생각되는 바닥에 조금 울퉁불퉁한 선을 긋고, 움푹 파인 모양을 형상하는 원을 그리고 절구통과 토끼(귀가 크니 토끼겠지 하는)를 그려 넣었다. 바보 같지만 머리 위에 달인 지 해인지가 떠있기도 했다. 후하게 점수를 줘도 그림 잘 그리는 여덟 살 첫째가 그린 것보다 못하면 못했지 잘 그리지 않은 그림에 조각을 했다. 정직하게 파낼 부분은 파내고 남겨두는 부분은 말끔히 남겨뒀다. 잉크를 묻혀 찍어내니... 하하.... 정직하게 못 그린 유치원생의 그림이 찍혀 나왔다.


그날 이후로 3년 동안 미술 수업을 듣지 않았다. 선생님의 잡무 중 일부를 대신해 드리고 과제점수 '우'를 받는 것으로 타협했다. 내 작품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은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며 수업 중 미술활동을 하지 않아 주길 바랬다. 실제 미술 활동을 해서는 '우'를 받을 방법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잘하지 못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 '잘 못하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는 건 해를 끼치는 일이야.' 무의식에 이런 생각이 자리 잡혔다. 덕분에 지금도 '잘 못하는 것'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눈앞에 놓이면 그냥 신랑을 찾는다. "여보~ 이거 해줘." 별 거 아닌 것도 매번 찾으니 답답한 신랑은 "이건 이렇게 하면 돼. 해 봐." 하며 연습을 시킨다.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되는 것에 놀라지만, 다음에 다시 비슷한 일이 닥치면 나는 해결하기보다 "여보~~!" 하며 남편을 찾는다. 괜히 건드렸다 아예 망가지는 것보단 잘 아는 사람이 보는 것이 낫다는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Photo by Nick Grappone on Unsplash



"이곳에 있는 석물(石物)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야. 참, 이런 탑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
"네? 틈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탑이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한 법이지..."
 스님이 들려준 설명이 건축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동안 내 삶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감정과 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완벽을 기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만든 대상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 같다.
 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언어의 온도> p.36


우리는 완벽함을 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 '잉여 인간. 쓸모없는 인간. 도움이 안 되는 인간. 월급 루팡' 등의 단어로 낙인찍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말이다. 잉여 인간이 그렇게 나쁜 건가? 누구에게 어떤 해를 끼치기에 잉여 인간이면 안될 것 같은 조바심을 가지는 것인지 한 번쯤 물어봐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완벽하지 않으면 잉여 인간이라고 치부하는 흑백논리는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의 눈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남편과 살면서 늘 완벽한 모습으로만 남들에게 보여야만 한다는 강박을 조금 내려놓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아이 어린이집 하원을 가고, 집 앞 마트를 간다.(어린 시절에는 이런 사람들을 자기 관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했었다.) 부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지만 남들 앞에 이렇게 내어놓는다.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글과 내 말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용기를 내어 다듬어지지 않는 생각을 드러내고 나눔으로써 어설픈 위로와 격려를 전하기도 한다. 어쩌면 산다는 건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하는 의지와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 사이의 어디에서 갈팡질팡하며 조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글을 거창하게 썼지만 사실은 계획한 만큼 읽지 못했고,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음을 예쁘게 포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양심에 조금 찔리지만 이렇게라도 부족함을 드러내고 약속을 지키는 오늘을 칭찬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석탑이 수백 년 이상을 견디는 힘은 채우는 것도 메우는 것도 아니라는 스님의 말에 틈을 보이는 인간적인 나를 조금 더 자신 있게 보이기로 마음먹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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