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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ug 23. 2020

뿌리가 튼튼한 나무

결국 잘 먹기 위해 잘 사는 것은 아닐지...

오랜만에 여유로운 척하며 영화를 봤다. (덕분에 잠이 부족한 건 비밀로 하자.) 다른 글에서도 혹은 떠도는 몇몇 어여쁜 영상들만 부분적으로 본 적도 있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참 많은 메시지를 담은 영화이다 싶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오랜만에 음식을 만드는 정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좋았다. 




사실 무엇을 위해 동동거리며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한창 필요할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있으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책 읽느라 글 쓰느라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멈칫할 때가 있다. 많이 들었던 조언처럼 몇 년만 더 키우고 나면 훨씬 손이 덜 갈 텐데... 그 몇 년을 못 참아 아이들을 희생시켜가며 동동거리고 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코로나로 주중이고 주말이고 상관없이 연일 모두가 함께 있으니, 중간에 짬이라도 내어 놀아주기까지 하면 매 끼니는 때우듯 먹어치우고 말게 된다. 끓여놓은 국에 냉장고에 들어있던 밑반찬 한 두 개. 급하게 인스턴트 햄에 계란 프라이. 그것도 없으면 시켜먹고, 여의치 않으면 반조리 식품이나 반찬을 사서 먹는다. 지금 내 새끼들 입에 들어가는 하나하나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원히 남고 남는 근본이 될 텐데도 말이다.


시간과 정성, 중요하다. 하지만 배고프고 졸리다고 아이들이 보채기 시작하면 손이 열 개라도 좋은 음식을 해 먹이기 힘들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지 않은가! 늘 최선을 다한 선택이라 믿지만 돌아보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하는 질문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Photo by Werner Sevenster on Unsplash


영화 속 주인공인 혜원은 집으로 돌아온 이유를 그렇게 말한다. "배가 고파서..." 

끼니를 때우는 많은 길거리 음식과 반조리 식품들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다 아는 그 허기짐 말이다. 그래서인지 혜원은 집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쌀을 확인하고 배추를 캐어 배춧국을 끓인다. 뜨끈한 배춧국에 갓 지은 솥밥. 뜨거운 태양빛에 숨이 막히는 여름에 쓰는 글이지만 속이 다 풀릴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지는 메뉴이다.


생각해보니 아이를 낳고부터 참 여유가 없었다. 살림은 서툴고 밥을 한 끼 먹자면 서너 시간이 기본. 아이는 밤낮없이 보채고, 요령이 없으니 아이를 둘러업고 계란 하나 굽지도 못했다. 시간이 흐르니 요리는 조금씩 나아지는데 아이가 셋이나 되어있었다. 실력은 좋아졌지만 늘 동동거리며 끼니때를 맞추기 급급하다.


첫째가 태어나서 백일도 안되었을 때였다. 너무너무 허기가 지는 날이 (그때는 아이 하나에 전전긍긍하느라 제대로 못 챙겨 먹었다) 반복되니 고기가 먹고 싶어 남편과 큰 맘을 먹고 고기를 구웠다. 남편은 고기를 굽고 쌈을 싸서 한 입씩 내 입에 넣어줬다. 나는 아이를 안고 달래다 한 입, 젖먹이다 한 입. 그렇게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위장으로 바로 넘어가는지 모를 고기를 먹어치운 적이 있다. 

그 날이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가 고기를 먹어서만은 아니다. 제대로 먹어보겠다고 씻은 상추가 잊히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남편이 잠시 아이를 봐주는 사이 상추를 씻었다. 그래야 고기를 구우면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한 장 한 장 씻는 시간이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마음이 급하니 물에 식초를 후루룩 풀어 설렁설렁 흔들어 봤다. 결과는... 예상대로 상추 심지 쪽이 하나도 안 씻겨 결국 당장 먹을 몇 장만 다시 씻어 먹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돌려보내버렸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방송을 듣고 있었다. "아니, 배춧잎 한 장도 깨끗하게 씻을 여유도 없으면서 숨은 어떻게 쉬세요?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내 가족들 입에 들어가는 야채 하나도 깨끗이 씻을 시간이 없단 말인가요!" 뒤통수가 얼얼했다. 주방에서 음식재료 준비하는 시간을 아깝지 않게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 그때부터였다.


시간이 꽤나 흘렀다. 여전히 나는 상추 한 장을 씻으면서도 시간이 아까워 귀에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있다. 가능하면 손이 적게 가는 메뉴를 선정하고, 빠르게 차려낼 수 있는 것들을 선호한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메뉴는 정말 특별한 날. 모두가 여유롭고 여유로워서 시간이 많은 어느 날만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아삭한 양배추를 한 장씩 뜯어 씻고, 먹기 좋게 채 썰어 부침개를 부칠까? 생각해 본다. 너무 쉽게 모두가 건강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고작 '한 끼'라고 폄하하고 있진 않았는지. 내게는 꼭 필요한 영화였던 듯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이 둘과 남편은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있다. 큰 아이는 엄마가 집중한 틈을 타 젤리 한 통을 들고 아지트로 들어갔다. 여유 있고 조용한 시간이라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곧 아이들이 깨어나고 배고픔과 사랑 갈구에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이성은 달아나고 본능만이 남아 또 동동거리며 허기를 면할 것을 후다닥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식재료들이 마치 살아있는 향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만큼 생생하게 자신의 소리를 들려줘서 너무 좋았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영화는 편집된 영상이다. 그만큼 건강한 식재료를 손수 길러내려면 파스 몇 박스를 온몸에 붙여도 나아지지 않는 노동을 해야 한다. 떡을 찌고 막걸리를 빚는 몇 분의 영상이 실제로 하면 몇 시간에서 수일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실패도 수두룩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맛있는 것들을 만들고 예쁘게 담아내기까지 상상 이상의 설거지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있다고 생각하자."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


여기까지 쓰는 동안 아이들이 깨어났고, 한바탕 빵 반죽을 했다. 한쪽에서는 식빵이 구워지고 곁에서는 아이들이 밀가루 반죽 놀이 중이다. 온 얼굴에 밀가루를 묻히며 피자다 짜장면이다 키득거리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살면서 힘들어지는 어느 날, 길에서 맡는 빵 냄새에도 다 같이 모여 빵을 구워서 먹던 이 순간을 기억하며 지친 어깨를 치켜세울 수 있게 되기를... 정말 맛있는 한 끼를 스스로를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차릴 수 있기를... 그렇게 완성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Photo by Chris Ross Harris on Unsplash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 일 없고 인정도 못 받으니 현실의 내 모습을 점점 미워하게 되고 못마땅하여 보기 싫어진단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p.371


돌아보니 처음 상추를 씻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던 이유는 공들여 씻어내는 시간을 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엄마가 늘 해주니까. 그냥, 밥 먹자! 하면 상추는 물을 스쳐 상에 올라오는 줄로만 알았다. 환상 속의 나는 살림을 30년 넘게 해 온 베테랑인 엄마와 동급이지만, 현실의 내 모습은 상추 한 장을 씻는데도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만큼 모자라서는 아녔을까? 

마찬가지로 저녁 메뉴를 고민하면서 양배추 부침개를 떠올리지만 그게 현실이 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씻고 썰고 반죽하고 굽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 막내가 똥을 쌀 수도 첫째와 둘째가 싸움이 날 수도 있다. 밀가루를 뒤집어 청소를 급하게 먼저 해야 할 수도 있고, 심기가 틀어진 막내가 어미야 날 안아라를 외칠 수도 있다. 

현실은 영화처럼 편집이 없다는 걸 자꾸만 잊는다. 나는 30년 주부 경력의 베테랑이 아님도 잊는다. 그 순간 스스로의 무능력에 화가 나고, 미뤄진 저녁 시간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이들을 핑계로 분풀이가 시작되고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부침개가 늦은 시간 식탁에 올라갈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엄마가 되었다. 겨우 8년 차 주부이지만 앞으로 시간이 쌓이고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상추를 한 장 한 장 씻어내는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말만 하면 부침개 하나가 뚝딱 나오는 만큼 실력이 좋아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재료가 내는 향과 맛을 살리고 조리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더라도 더욱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기뻐서 힘든다는 생각은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오늘 이 글은 아이들이 자라 자신이 먹을 한 끼를 준비하는 때가 오면. 당연히 처음은 지루하고 힘들고 동동거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엄마도 엄마가 되고 보니 그 과정이 곁에서 보는 것만큼 쉽지는 않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쓰다 보니 먹거리를 준비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더 많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혜원의 엄마처럼 뿌리를 내릴 때까지 기다려줄 수는 없었던 걸까?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는데... 나는 너무 서둘렀던 건 아닐까? 정답이 없는 이런 의문이 들어버리면 참 난감한데 말이다. 


어찌 되었건 '엄마'는 너희가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장난치며 보낸다. 내일은 또 어떻게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겠지만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는 걸 부디 알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함께 쓰며 이제 마무리하려고 한다. 늘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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