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와서 좋냐고? 아니. 난 싫은데.
내가 지금 우리 아이들 나이였을 때 눈을 봤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질 않다. 사진으로 남았기에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만 들춰보면 그때는 겨울이면 눈이 제법 많이 왔었다.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수 있을 만큼.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차가 다니는 길과 주차장까지 모두 놀이터처럼 사용했었다. 아파트 뒤편에 제법 높은 언덕이 있어 포대자루에 몸을 싣고 눈썰매도 탔었다. 당연히 재밌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게도 그런 추억이 있었다는 정도만 사진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 기억마저도 가지기 힘든 지금의 아이들이 안타깝다는 느낌 정도가 전부일뿐이다.
머리가 크고부터는 눈 오는 날이 싫었다. 태생적으로 몸이 차갑기도 했고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눈 오기 전후의 추위가 싫었다. 하얗게 보이지만 곧 질척거리고 더러워질 그것들이 내내 못마땅했다. (낭만이라곤 그때도 지금도 없다.)
운전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눈이 더욱 싫어졌다. 언젠가 경주로 여행을 계획했는데, 당일 아침부터 앞이 보이지 않게 눈이 내려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눈길을 뚫고 여행을 강행했지만 길이 미끄러워 3박 4일 내내 콘도에만 머물고 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딱 한 번 눈이 좋았던 적이 있다. 서울에 올라와서 눈이 반가웠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첫째를 출산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다. 왜 그날 혼자 집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은 회사를 가고(분명히 쉬고 있었을 땐데...) 봐주시던 친정 엄마도 잠시 집을 비우셨던 날이다. 누워서 잠들지 않는 아이를 안고 답답한 방 안만 서성이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금세 세상이 하얗게 덮이고 창 너머 뒷마당(우리 집 마당이 아니다. 옆집 마당)에 나무에 눈꽃이 피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만 감성적이었던 것 같다.
난 지금도 눈이 별로 반갑지 않다. 위험하고 춥고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이들은 좋아하지만 눈놀이를 나갔다 오면 빨래가 한가득이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눈놀이를 위해 매년 장갑을 사야 하고(왜 매년 장갑은 없어지는 걸까?) 목도리와 모자도 장만해 두어야 하는 것이 귀찮게 여겨진다. 더러운(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아스팔트 위에 눈은 그리 깨끗하지 않다) 눈 위를 뒹굴고 오면 외투부터 신발까지 모조리 빨아야 한다. 이틀에 걸쳐 놀 기미가 보이면 다음 날을 위해 빠르게 장비를 말려놓기까지 해야 한다.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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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부터 아이들은 눈을 기다린다.
"엄마, 아직 겨울이 아니에요?"
"아니. 지금이 겨울이지."
"그런데 왜 눈이 안 와요?"
"그건, 지구가 열이 나서 아파서 그렇데."
"그럼 이제 눈이 안 와요?"
"글쎄. 눈이 언제쯤 오려나? 기다려보자."
며칠 전. 거짓말처럼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아이들은 지구가 이제 아프지 않아서 눈이 내렸냐고 물었다. 여전히 아픈데 너무 많이 아파서 오는 눈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다 설명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마 나 혼자 있었으면 올해도 아이들은 눈 구경을 집에서만 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마음을 내어 아침 출근길에 눈놀이를 권했다. '출근길에 같이 걷자.'
덕분에 올해 네 살이 된 막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눈 구경을 했다. 부츠까지 야무지게 챙겨 신고 눈 위를 뒤뚱뒤뚱 걸어 다닌다. 첫째와 둘째는 뛰어다니며 눈을 만지고 뿌리고 눈 뭉치를 만들어보며 즐거워했다. 여전히 눈이 와서 좋은지도 모르겠고, 춥고 번거롭고 귀찮게만 느껴지지만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잠시지만 불평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4년 만에 한 번 나오는 거니까. 다음 눈놀이는 4년 후다."
지켜지지도 않을 으름장을 놓고 눈놀이를 끝냈다. 그날 밤. 정말 오랜만에 아이들은 피곤한 몸으로 곤히 잠들었다. 아이들 기억 속에 어떤 추억으로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는 낭만을 아는 사람을 자랐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