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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pr 11. 2021

뼈 속까지 내 편

할머니만 줄 수 있는 사랑

매년 김장철에는 친정 엄마가 오신다. 일부러 일을 만들지 않으면 서울까지 오실 일이 없으니 김장을 핑계 삼아 며칠 묵었다 가신다. 아이들은 할머니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엄마 곰 주위에서 뒹굴뒹굴하는 아기 곰 같았다. 한 공간 안에서 뒹굴다 할머니 손길에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새로운 잘못을 깨닫는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아이들과 저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까?’


‘아이들이 내 곁에서도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놀았을까?’




엄마가 집에 가시던 날 아이들은 울었다. 첫째는 진정하고 놀다가도 갑자기 나와서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랑 덮던 이불이 저기에.... 흑흑... 할머니랑 같이 놀던 윷가락도 그대로 있어..."




놀다가도 할머니의 흔적을 보며 다시 슬픔에 잠기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할머니와 헤어지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많이 그리워하며 우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부족해서는 저러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날 밤, 괜한 염려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일이 생겼다.




“엄마가 할머니처럼 잠들 때까지 등 쓰다듬어 주면 좋겠어.”




큰아이가 울먹였다. 


친정엄마는 자주 등을 쓰다듬어주신다. 자라는 내내 나 역시 그 손길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깨울 때도 엄마는 꼭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쓰다듬으면서 일어나라고 하셨고, 같이 TV를 봐도 쓰다듬어주셨다. 어떤 때는 주방일을 하다 말고 오신 터라 손이 차갑기도 했지만 찬 기운에 놀라기보단 금방 바뀌는 따뜻한 손길이 좋아서 괜스레 더 이불속을 파고들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이들에게 한 번도 그런 스킨십을 해준 적이 없었다.




© williamk, 출처 Unsplash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에겐 외할머니 한 분만 살아계신다. 첫째가 뱃속에 있을 때 아이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막내가 뱃속에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두 해 전 친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 첫째는 여덟 살이라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둘째와 셋째는 그런 기억도 없다. 오로지 외할머니 한 분뿐이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내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부모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특히, 전적으로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모습은 부모가 하기 힘든 영역인 것 같다. 


버릇이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잘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부모는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그에 반해 할아버지, 할머니는 좀 다르다. 100% 수용. 어떤 요구 사항도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신다. 정말 위험한 일이라면 아이들 마음을 어루만지고 타협안을 찾는 지혜도 있다.




살면서 그렇게 완전한 인정을 받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나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그런 존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유일하게 조부모의 존재만이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큰아이는 입이 짧고 편식이 심하다. 오로지 계란, 치즈, 생선만 찾는 통에 매 끼니를 챙기는 입장에선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아이가 할머니가 주신 음식은 뭐든 잘 먹는다.




“할머니, 생선 있어요?”


“있지. 쌩쌩이 주려고 할머니가 열 마리나 사놨지.”


“우와~~ 할머니 최고!!!”




농담이 아니다. 친정에 1박 2일을 있어도, 일주일을 지내도 매 끼니 생선이 올라온다. 간혹 생선이 빠지는 끼니는 계란찜, 계란말이가 대신한다. 아이가 원하는 반찬이 없는 날이 없다.




“아~!! 엄마! 애 버릇 나빠져! 그냥 있는 대로 줘.”


“생선 굽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 이렇게 잘 먹는데.”


“애가 생선 밖에 안 먹잖아!”


“뭐든 잘 먹으면 된 거지.”




할머니 역성에 아이는 의기양양해진다. 거보란 듯이 할머니가 주시는 김치도 잘 받아먹고, 매운 국도 다 먹는 먹성을 보이기도 한다. 잘 먹더라 싶어 친정 엄마가 해 주신 국을 한 냄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첫 끼니에 국을 올렸더니 큰 아이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한다.




“이거 너무 매워서 못 먹겠어.”




아이가 밥을 안 먹고 편식을 하는 이유는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까다롭게 굴어도 다 받아들여지는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부모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부모님의 양육이 옳다는 말도 아니다. 부모라서 줄 수 없는 사랑의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영원히 뼈 속까지 내 편인 사람이 지구에 한 명쯤 있다는 든든함. 천군만마보다 더 대단한 뒷배를 둔 것 같은 의기양양함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달라지지 않는가?




엄마가 모두 채워줄 수 없음을 인정하면 보이는 것. 그중 하나가 조부모님이 주는 무한한 사랑이다. 가끔은 아이도 일탈이 필요하다. 적당히 눈감아주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마음껏 응석 부리고 사랑을 넘치도록 받는 순간만큼 소중한 경험이 또 있을까? 가끔은 엄마가 물러서도 괜찮은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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