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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pr 11. 2021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던데

엄마 혼자 키워야 하는건 아닙니다.

막내는 생후 6개월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때 ‘너무 어린데...’라며 혹시 워킹맘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전업주부이면서 너무 어린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이 아니냐는 질타가 숨겨진 말이었을 테다.


정말 너무 어릴 때부터 보낸 걸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이가 기관을 다니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다.


솔직히 어린이집도 보내고 싶다고 원하는 곳에 마음껏 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첫째는 태아일 때부터 대기를 걸었지만(지금은 출생 후에 신청할 수 있다) 국공립 어린이집과 구립 어린이집은 대기번호가 200번대였다. 둘째가 생겼다는 걸 알자마자 급히 사립 어린이집을 알아봤다.


“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을 나이에 보내야 되지 아닐까?”

“괜찮아. 말을 다 하진 못 해도 의사 표시는 하잖아.”

“그래도…….”

“평생 데리고 있을 거야? 둘째도 생각해야지.”

“…….”

“동생이 태어나고 어린이집에 가면 동생한테 엄마를 뺏겼다고 생각한다잖아.”

“그러면 안 되긴 하는데…….”


입덧이 시작됐다. 모든 상황으로 봤을 때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는 것이 전혀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지만 품에서 잠시라도 떨어뜨린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임신을 했다고 아이를 하루 종일 돌보지 못하는 내가 무능하게 느껴졌다. 이러고도 엄마가 될 자격이 있는지 자책하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예민한 아이는 엄마의 죄책감을 알아차린 듯 어린이집 가방만 보면 가지 않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도 한참을 놀다 점심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어린이집에 갔다. 현관에서 실랑이는 기본이 삼 십분. 결국 선생님께 안겨 울면서 들어갔다. 낮잠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밥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 남짓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것도 안 보내는 것보단 낫다며 자위했더니,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원장님이 상담을 요청하셨다. 혹시 어린이집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지 물으셨다. 당황스러웠지만 전혀 그런 건 아니었기에 아니라고 답했다.



원장님은 첫째 엄마들의 두려움을 잘 알고 계셨다. 엄마가 두려움에 계속 사로잡혀있으면 아이는 영원히 적응하지 않고 등원을 거부할 거라고 조언해 주셨다. 불안해하지도 마음 아파하지도 않아야 한다며 원장님을 믿고 단호하게 맡겨주길 부탁하셨다. 비슷한 시기에 남편도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평생 데리고 살 아이가 아니잖아. 얘도 또래도 만나고 자신의 삶을 가져야 해. 엄마가 경험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쌩쌩이는 유독 낯을 많이 가리고 예민한 아이라 감싸고만 돌면 사회성이 더욱 발달하기 힘들어. 이렇게 하는 건 아닌 거 같아.”



마음을 바꾸자 거짓말처럼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걸 즐거워했다. 입구에서만 울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과 어울리는 아이를 보면서 믿음이 굳건해졌다. 정말 필요한 일을 내가 막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생후 18개월에 처음 어린이집에 갔다. 둘째는 같은 기관에 13개월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막내는 국공립 어린이집으로 옮겨 생후 6개월부터 다니는 중이다. 셋 다 각자의 개성을 살려 친구를 사귀고 선생님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있는 만큼 다시 만났을 때 더욱 애틋하고 반가워하자고 말한다.



엄마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 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사회성은 엄마가 키워준다고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친구를 만나는 법, 관심 있는 이에게 다가가는 법, 싸웠을 때 화해하는 법,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아들이는 법, 화해를 하고 다시 친하게 지내는 법, 사회적 규범을 배우고 익히는 법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아이들은 자라면서 익혀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엄마와의 관계에서 배울 수는 없다.


© giselaatje, 출처 Pixabay



2020년. 코로나 19로 첫째는 1년 동안 두 달 정도 학교에 갔다. 처음 일주일에 하루를 갈 때는 다녀오면 꽤나 심란해했다. 친구가 너무 사귀고 싶은데 어떻게 다가가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학교를 다녀오고 나면 다음 등교 때까지 어떻게 친구에게 말을 걸어볼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엄마와 마주 앉아 '이런 말을 해볼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를 연습해봤지만 정작 아이가 친구를 사귀어 온 것은 매일 학교를 가면서부터였다. 크게 연습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귀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 자. 연. 스. 럽. 게. 친구를 사귀고, 나와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친해지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싸웠지만 다시 화해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해도 엄마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는 지금도 많은 엄마들이 처음 아이를 기관에 보낼 때 두려움과 자책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우는 아이를 보내면서 다들 한 번 이상은 자책한다.



‘아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꼭 보내야 할까?’


아이는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와의 이별이 처음이라 놀랐을 뿐이다.


어린아이에게 이별을 감당하게 하는 게 잘못하는 것 같은가? 언제가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이별이다. 그게 생후 6개월이든 60개월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처음에는 힘들어한다. 어른인 우리도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 잠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처음엔 힘들지 않은가. 똑같은 거다.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괜히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학교도 학원도 모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경험을 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엄마가 편하려고(물론 좀 편해지긴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자유부인이라 외치니까) 보내는 것만은 아니란 걸 꼭 알았으면 한다.


아이를 위해 열 번을 죽어도 열한 번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게 부모다. 그렇지만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온 마을의 힘은 빌리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협력이 모두 그곳에 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말로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기 바란다. 엄마가 할 수 없는 무엇을 채우기 위해 아이는 다른 경험을 쌓는 것일 뿐이라는 것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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