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젠 나를 찾지 마.
저녁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남편은 청소를 끝냈다. 오늘은 밀린 빨래도 없고 분리수거 쓰레기 배출일도 아니니 집안일은 끝난 셈이다.
“다 끝났지? 그럼 이제 퇴근합니다.”
아이들도 일찍 씻고 놀고 있는 중이니 잠들 때까지 여유시간이 생겼다. 예민각(책 읽고 글 쓰는 공간)에 앉아 글쓰기를 시작한다.
“엄마, 케이크 먹고 싶어요.”
6살 둘째가 늦은 간식을 찾는다.
“엄마는 퇴근했어. 몰라.”
“힝, 배고픈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뒤편에 앉아있던 남편이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 봐야 곧 아이에게 지고 말리라는 의미다.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오기가 생겨서라도 기필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며 다짐을 굳건히 한다.
30분 후.
“나 퇴근했다고옷!”을 외치며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남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래서 집에서 퇴근은 별 의미가 없다.
***
요즘처럼 카페 취식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에는 쉽지 않지만, 읽고 싶은 책이 많거나 써야 할 글이 쌓였을 때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별다방에 네 시간만 있다 올게.”
아무리 퇴근을 외쳐도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엄마를 찾기 마련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퇴근이 불가능하다. 엄마가 보이면 이유불문 '엄마~'하고 보는 아이들 덕분에 편한 작업실을 두고 불편한 카페를 찾는다. 남편은 흔쾌히 다녀오길 권한다. 먹을 것만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면 더 있다가 와도 상관없어 보인다.
꼭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외출을 하는 편이다. 아이들과 있느라 평일에 갈 수 없는 베이킹 수업을 다녀오기도 하고, 세미나나 독서 모임도 참여한다. 네 시간이라 쓰고 열 시간을 외출하기도 했다. 시간이 길어져도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영유아 자녀, 그것도 셋이나 되는 아이를 두고 하는 외출이 누구나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부담 없이 집을 나설 수 있었을까? 정확하게는 막내 수유를 끝내고부터였다. 내 몸이 아니면 안 되는 일만 아니면 남편은 모든 역할을 혼자 수행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남편은 아이들 먹거리만 해결되면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다.(요리를 크게 즐기지 않는다.) 평소에도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충분한 시간을 보내 친밀감이 잘 형성되어 있는 편이다. 아이들도 아빠만 있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잔소리하는 엄마가 없어서 좋아한다.
남편은 아이들마다 특성과 성향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고, 무슨 이유로 토라진 건지 빠르게 알아채는 센스도 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마다 전화해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묻지 않는다.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몫까지 온전하게 해내는 아빠다.
엄마들이 주말 외출로 모임을 가지면 두 분류의 남편 유형을 만날 수 있다. 웬만해선 전화가 오지 않아서 궁금해서 연락하게 만드는 유형과 시시콜콜(심지어 아이 기저귀가 어디 있냐는 전화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전화로 물어보고 해결해야 하는 유형. 먼저 걸려오는 전화는 없지만 한 시간에 한 번씩 통화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요 한다면 후자 쪽에 가까울 확률이 높겠다.
대부분의 육아 상황에서 엄마는 혼자 판단하고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전업으로 육아를 하는 엄마나 일하는 엄마나 마찬가지다.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평소와 다른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먼저 연락이 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듯 평소에 엄마가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있기에 남편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빠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엄마는 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엄마가 외출을 했다면 웬만한 일은 아빠가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에 기저귀는 어디에 두는지, 응가는 어떻게 닦이는지, 아이가 졸리면 어떤 행패를 부리는지, 무슨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치트키처럼 사용할 수 있는 간식이나 게임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이마다 원하는 바가 다르고 성향이 다르니 충분한 경험이 필요하다. 사전에 준비 없이 ‘그까짓 것’이라며 호기롭게 아내를 내보냈다 당장 돌아오라며 소리치는 남편들을 숱하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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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유치원을 다녀온 첫째가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게 꺼낸 말이 있다.
"나는 엄마가 일하러 갔으면 좋겠어."
뜬금없이 일하는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말에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애써 침착하게 이유를 물었다.
"엄마도 퇴근하면 나랑 놀아줄 수 있잖아."
출근을 하는 아빠는 퇴근하고 오면 놀아주기도 하는데, 엄마는 퇴근을 안 해서 놀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늘 같이 있지만 딱히 시간을 정해서 놀아주는 게 아니다 보니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아이들은 비슷한 시기가 오면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올해 6살이 된 둘째가 며칠 전 똑같은 이유를 들며 엄마가 일하러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번 겪은 일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얘들아. 너희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지금이 퇴근이야. 이제 나를 좀 놓아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