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 바지 버리면 안 되니?

좋아하는 바지인데 꼭 버려야 하나요?

by 로지

우리 집은 아이들 방이 하나다. 작은 방에 책과 장난감이 들어가야 하고 책상도 필요하다. 이사를 오면서 2층으로 된 벙커침대를 짜 맞추고 양 벽면에 책꽂이와 수납장을 만들었다. 아직 혼자 잠들지 않는 아이들이니 2층에도 책꽂이를 올려 수납공간을 만들었다. 최선을 다해 공간을 만들었지만 넘쳐나는 장난감과 책으로 방은 늘 어수선하다. 특히 만들고 그리기를 즐기는 큰아이의 작품은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Photo by Jessica Ruscello on Unsplash


책을 읽겠다고 결심한 즈음부터 자연스럽게 아이들 방 정리는 아이들 몫이 되었다. 낮시간은 짬을 내어 나의 독서 시간을 확보하기 바빴고, 저녁에는 운동을 했다. 제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장난감들이 거슬렸지만 눈을 감고 아이들이 정리하도록 맡겨두었다. 물론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방을 뒤집어 버리는 날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맡겨만 두었기에 책상 위에 마구 쌓인 잡동사니들로 방에서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에 교과서를 받아온 큰 아이는 교과서를 둘 곳을 못 찾아 가방 안에 넣어두고 있을 정도다.


"엄마, 방 정리가 하고 싶어."


'기다리면 되는구나.'를 깨닫는 순간이다. 결국 누가 더 답답한가의 싸움인걸가? 온라인 수업을 듣고 난 아이가 갑자기 방 정리를 시작한다. 구석구석 짱박아 둔 만들기 작품들(이라 쓰고 나는 조잡한 종이조각이라 읽는다)을 큰 박스에 담고 읽지 않는 책들도 정리를 한다. 유치원에서 준 영어교재를 한참 째려보다 들어내니 책꽂이 한 칸이 생겼다. 첫째와 둘째가 그간 기관을 다니며 만든 작품집들도 한 박스에 모아 담는다.


큰 아이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던 나는 일손을 멈추고 아이에게 다가간다.

"무슨 일이 있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

이 말을 신호로 울음을 터트린다.

"내가... 흑흑... 아끼는 작품인데... 자리를... 놓을 데가... 흑흑... 엄마가 화낼 것 같아서.... 흑흑... 버리겠다고... 흑흑 속상해."

이럴 때 절대 하면 안 되는 게 웃는 건데, 나는 꼭 웃음이 터지고 만다. 웃음을 감추기 위해 꼭 끌어안고 속상함을 달래준다. 본인 생각에도 놓을 곳이 마땅히 보이지 않는 몇몇 작품들이 문제였던 거다. 엄마 눈치가 보여 버리겠다고는 했는데 막상 쓰레기통에 넣고 보니 속이 상했나 보다.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아. 쌩쌩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버리는 거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두는 거야."

한참 속상함을 달래고 합의점을 찾는다. 소중하다고 생각되지만 둘 곳이 마땅하지 않은 것들은 다시 꺼냈다. 해결책으로 다른 박스에 담아두고 한 달 동안 열어보지 않으면 그때 버리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 봐야 서너 개의 작품(?)이 버려질 것들에서 구조되어 나왔다.




날씨가 훅 하고 더워졌다. 기모가 들어간 두꺼운 옷들을 세탁해서 넣어두고 얇은 옷들과 반팔 일부가 밖으로 나온다. 매 계절마다 하는 일이다. 다행인지 부부가 모두 옷에 크게 관심이 없어 늘 입던 옷도 찢어지지만 않으면 (너무 좋아하는 옷은 구멍이 좀 나도) 그냥 입는 편이다. 많이들 하는 '작년엔 뭐 입었지?'를 하지 않는다.


큰 아이가 태어나던 해에는 일 년에 절반을 친정에서 살았다고 할 정도로 오랜 기간 지냈기에 부부의 옷 몇 가지가 친정에 마련되어 있다. 이번에 친정에 갔을 때 일이다. "너네 옷 좀 정리해야 하는데." 엄마 말씀에 서랍장이 처음보다 많이 정리된 듯한데 뭐가 더 정리하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 빠르게 서랍장을 다시 뒤졌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남편의 체육복 바지가 별로 마음에 드시지 않는 눈치다. '이 체육복 바지'로 말하자면 신랑이 나를 만나기 전부터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꽤나 후줄근해 보이기는 하나 아주 많이 편하게 입는 옷이다. 잘 때도 입기에 무리가 없고 아이들과 마구 뒹굴기도 그만이다. 입고 텃밭에 가서 일해도 옷이 상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마구 빨아 다시 입을 수 있으니 최고의 아이템이다.

친정에 있는 나의 사계절 아이템인 베이지색 면바지는 대학생이 되면서 처음 간 보세 샵에서 마음에 쏙 들어하며 산 바지다. 당시에는 큼직하게 입었던 바지였는데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불어난 몸에 안 맞을 뻔하다가 최근에 운동을 하면서 체중이 빠지고는 다시 편하게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15년은 된 바지이다.


엄마는 티셔츠 하나, 체육복 하나 계절에 맞춰 새로 사 입지 않는 딸 내외가 크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눈치다. 우리 부부는 남편의 체육복 바지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에 새로 산 운동용 바지랑 바꿔두고 갈까?' 하다가 정직하게 두고 왔다. 남편과 나 모두 바지를 버릴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바꿔두고 서울로 가져왔다 언젠가 우리 집에 오실 엄마가 다시 그 바지를 입고 있는 사위를 보고 기절하실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옷장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이 옷을 언젠가는 입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옷장 정리를 한다면
우리의 옷장은 잘 입지도 않는 옷들로 가득 들어차
매우 정신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옷을 정말 좋아하는가?'라는 생각으로 옷장 정리를 한다면
불필요한 옷들이 사라지면서 옷장은 깔끔한 상태가 될 것이다.

<에센셜리즘> p.134



글을 쓰는 지금도 구멍이 숭숭 난 티셔츠와 허리 고무줄이 늘어나 한없이 편한 바지를 입고 있다. 언젠가 딸아이가 "엄마 옷에 구멍이 났어!"라며 손가락을 쏙 집어넣고 데굴데굴 구른 적이 있다. 아이들 기억 속에는 구멍 난 옷을 입고 대수롭지 않게 생활하는 엄마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을까? 옷을 정리하는 기준이 편하고 좋아하는 옷이다 보니 흔히 생기는 일이라는 것을 언젠가 아이들도 알아챌 날이 오지 않을까.


일 년 내내 옷을 전혀 사지 않고, 있는 옷은 절대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정리하고 입지 않는 옷들은 버린다. 그렇게 버려온 옷들만 해도 열 박스는 넘을 것이다. 이 만큼 버리자면 이 만큼 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입지 않을 출근용 정장. 커진 골반으로 소화할 수 없는 아가씨 전용 원피스. 아이들 피부에 닿지 않아야 할 거친 질감의 옷들과 털이 많이 날리는 옷. 살 빠지면 입어야지 하고 아껴준 청바지. 이렇게 많은 것들을 버리고도 아직도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한 옷들이 높은 평당가를 자랑하는 서울 한 복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중 일부는 정말 운동을 하고 살이 빠져서 다시 예쁘게 입고 있기도 하다. 다시 입는 옷의 공통점은 사이즈가 작아지기 전에도 매일 입을 만큼 좋아했던 옷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지금도 매일 입고 있던 옷들은 10년이 넘은 옷들이 많다. 오늘 아침에 입고 나간 후드 티도, 정신없이 친정에 놓고 온 청바지도, 여름철 에어컨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마련해둔 면 재질의 숄도 모두 10년 이상 내 옷장을 지키고 있던 것들이다.



Photo by Christian Bolt on Unsplash



계절이 바뀌고 옷장을 다시 정리한다. 몇 년째 째려만 보면서 다시 담아둔 옷들을 정리하려고 내어놓는다. 이 것은 비교적 비싸게 주고 구입했다는 기억이 있는 옷들이다. 지불한 비용에 비해 옷을 크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편하게 입지도 않았다. 알고 있지만 지불 비용에 대한 미련이 옷을 정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돈을 지불하고 소유한 물건에 대해서는
그 물건의 실제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매기려는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에센셜리즘> p.33




계절 옷 정리와 아이의 방을 정리에 모두 같은 방식을 적용해 본다. 지금 당장 입지 않거나 쓰지 않는 물건과 작품은 한 박스에 넣어둔다. 오늘 날짜를 쓰고 기한을 정해둔다. 옷의 경우 최소 한 계절이 지나는 5개월, 아이의 장난감과 작품의 경우 1개월. 그 기간이 지나는 동안 찾지 않거나 필요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없어도 무방한 것이라 인정하고 과감히 정리한다. 책에서 추천하는 '리버스 파일럿'의 응용 버전이다.


정리하고 나서 몇 년 뒤에 '이런 게 있었는데? 버렸나?' 하는 아쉬움이 들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는가? 평당 삼천만 원을 넘는 집에(더 비싼 집도 많겠지만) 몇 년씩 보관 비용으로 공간을 내어주는 것보다 그냥 필요할 때 다시 저렴하게 구입하거나 빌리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이제 얼른 글을 마무리하고 남은 정리를 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오늘도 한 박스 이상의 물건이 정리되어 나갈 것 같으니 여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20200507_095443.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단 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