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왜 그렇게 읽기 싫었을까?
나에게 '무식하다'는 말은 평생 풀어야 할 숙제 같은 말이다. 잠시 설명을 하자면 학창 시절 어느 선생님께서 남긴 말이 있다. '역사도 몰라, 위인도 몰라, 신화도 몰라 기본적으로 아는 게 없는 너. 같. 은. 무. 식. 한. 애들은 평생 공부를 해야 해' 뭐... 이 정도 뉘앙스였을까? 그다지 성적이 나쁘지도 않았고 나름 똑똑하다는 칭찬만 듣다가 날벼락을 맞은 날이다. 짐작하건대 '무식한 애들'이라는 외침이 무의식에 남아 나를 계속 공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 상처 받은 것 같지만 단순히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명제만 남기고 끝난 에피소드다. 아주 없는 말도 아닌 게 정말 역사, 세계사, 고전 문학, 신화 등 사람들이 기본이라고 하는 것 중에 아는 게 없는 건 사실이다. 덕분에 이런 분야는 갈증과 부담이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무식'과 맞닥뜨리게 하는 분야들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그리스 로마 신화다. 큰 아이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떡하지?' 책을 읽긴 해야겠는데 정말 손이 안 갔다. 이미 부담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하늘에 그려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드라인에 맞춰 읽었지만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띄엄띄엄 건너뛰어가며 읽는 시늉을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읽는 내내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익숙한 신의 이름과 별자리만 편식하듯 눈으로 훑는다. '무식'을 떨치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패배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Photo by Lacie Slezak on Unsplash
<마흔의 공허함,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다>를 지인이 추천해 주었다. 특별히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당부가 있었다. 흔쾌히 대답한 것치곤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읽어냈다. 읽었다가 아니다. 읽어냈다가 맞다. '밀리의 서재'의 도움을 받아 오디오북으로 들으면서 읽으니 조금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절반쯤 읽었을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왜 그렇게 어렵고 싫었을까?
우선,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철수, 영희와 같은 이름으로 수십 명이 등장해도 인물 관계가 헷갈려서 기록을 해야 할 판이다. 실제로 <토지>는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물며 꼬부랑 말을 한국어로 풀어놓은 이름도 길고 긴 인물들이 수십 명씩 등장하는 신화라니. 이름만 보다가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모자라 관계가 어찌나 복잡한지. 부인도 많고 자식도 많고 자식의 자식도 있고, 한 여자가 신의 아이를 낳고 다른 남자랑 결혼도 한다. 관계도를 그리기도 어렵게 말이다.
'라떼는'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가 없어서 일까? 처음부터 만화로 쉽게 접했으면 즐겁게 읽었을까? 만화의 접근성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만화로 접했던 삼국지가 실제 삼국지를 읽게 하는 원동력이 아녔음은 분명하니 그것도 아니지 않을까?
고민의 끝에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욕망과 행동이 너무 적나라하게 나온다. 아마도 외면하고 싶고 인정하기 싫었던 내재된 본능들을 행동으로 옮긴 그들의 모습과 최후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는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은데 양심이 찔려서 할 수 없게 되니까 피했던 건 아닐까?
마음에 드는 여자는 일단 건드리고 보는 제우스. 그저 그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인생이 꼬이고 시련을 겪는 여인들. 충분한 사랑을 받고도 결국 의심과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에로스를 잃어버린 프시케. 그녀가 다시 사랑을 되찾기 위해 시련을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들여다보면 본인의 노력보다는 운과 도움이 더 많이 작용했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스토리. 그저 예쁘게 태어났을 뿐인 메두사의 가혹한 운명. 아버지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태양 마차를 끌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파에톤. 적당한 비행을 해야 한다는 당부를 저버리고 태양 가까이로 날아올라 최후를 맞이하는 이카루스. 이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운명을 거슬렀을 거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을까?
어느 인물 하나 납득하기 쉬운 사연을 가진 이 없고, 덩달아 억울하기까지도 한 스토리들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해도 극복하지 못하고 순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저변에 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긴 이유와 지금도 그것에서 삶의 조언을 구할 수 있다는 논리와는 별개로 외면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더 강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니 과거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극복해보겠다고 책을 산 흔적들이 있다. 일단 불편했던 마음을 알아챘으니 조금은 다르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엔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즐기듯 큰 아이와 함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로 보며 낄낄거려볼 예정이다.
덧붙여 <운명의 과학>은 '평생 학습이 뇌의 건강을 유지하는 훌륭한 전략'이라고 한다. 비록 상처가 된 말이긴 하나 '무식'이라는 말이 박힌 덕에 마흔이 넘도록 공부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뇌가 건강해지도록 도움을 주신 어느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