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처음부터 당근을 좋아하진 않았단다
주말 아침. 계란 토스트로 간단히 해결하고자 했다.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 둔 식빵을 우유와 함께 풀어둔 계란물에 넣어 버터를 두르고 구워낸다. 냄새가 기가 막힌다. 군침도는 한 입을 먹고 있다가 그만 실랑이가 벌어졌다.
"설탕 뿌려줘."
"안돼."
"힝~"
시작은 남편이다. 따끈한 토스트에는 설탕을 솔솔 뿌려먹어야 맛있다며 혼잣말을 한다. 단 것 좋아하는 첫째가 흘려들을 리가 없다. 안 먹겠다며 토라져 있는 아이를 보고 성질이 난 나는 후다닥 먹어치우고 자리를 뜬다. 큰 아이는 먹지 않고 시위 중이다. 남편이 거든다. "그냥 뿌려줘. 맛있으면 0칼로리~"
결국 승자는 첫째가 되었다. 어부지리로 뭔지도 모르고 둘째도 같이 해달란다. 망했다. 다시는 아침에 토스트 굽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하며 그렇게 식사시간이 끝났다.
<운명의 과학>을 읽는 중이다. 도넛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엄마의 엄마로 세대를 거슬러 유전적으로 각인된 신호체계가 이어져 내려와서라는 이야기를 보았다. 아직 완독 한 상태가 아니니 단정하긴 어렵지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내가 좋아해서 아이가 단 걸 좋아하는 거라고? 내가 저렇게 편식을 하는 유전 체계를 물려줬다고? 말도 안 돼. 나는 정말 골고루 먹는 사람이라고!'
나는 단맛을 극단적으로 라고 할 만큼 싫어한다. 음식에 설탕도 거의 들어가지 않도록 조리한다. '당'이 필요할 때는 70% 이상의 카카오가 포함된 다크 초콜릿을 먹었다. '정'을 나누는 파이 같은 건 손에 쥐어 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랬던 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하루에 생크림 케이크 한 판씩을 먹었다. 매일매일 케이크를 먹어도 누우면 또 생각이 나서 자다 말고 일어나 냉장고에 남은 케이크를 먹고 잔 적도 있다.
그 영향인지 큰 아이는 단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생크림 케이크는 단 편에 속하지도 못한다. 사탕, 젤리, 콜라도 부족해 아예 설탕을 뿌려 먹는 토스트라니. 타고나길 치아도 무르게 가지고 태어나 멀쩡한 이가 몇 개 없다. 영구치 어금니도 충치가 생겨서 엄마는 속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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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 가보면 이유식도 편식 없이 잘 먹던 아이였다. 다양하게 먹이던 음식 중에 치즈가 들어가고, 김이 들어가면서 입맛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 날 단 맛을 접하고 사람이 바뀌었다. (참고로 아이 셋 중 단 맛도 제일 늦게 접했고, 시판 과자도 가장 늦게 노출되었다.)
아이는 틈만 나면 사탕, 아이스크림, 젤리를 먹을 방법을 강구한다. 어떻게든 말리는 엄마와 함께 군것질을 하는 아빠 사이에서 아이는 점점 요령을 익혀간다.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일까? 편식의 대표 주자가 되어버린 첫째를 보면서 엄마는 좌절감을 맛본다.
경험에 따르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아동기 초기, 많게는 만 18세나 19세 정도까지도
변화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끈기 있게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운명의 과학> p.104
<운명의 과학>에서는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말한다. 꾸준히 새로운 채소 등 새로운 음식을 계속 제공해 주고, 보상체계를 유리하게 사용해보라고 조언한다. 브로콜리(첫째가 별로 안 좋아한다)를 먹으면 밖에 나가 놀아도 좋다고 허락하거나 칭찬을 많이 해 주면 '브로콜리-좋은 일이 생긴다'와 같이 긍정적으로 연관 짓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엄마가 브로콜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나도 별로 안 좋아했다) 힘들게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엄마가 좋아하지도 않는 브로콜리를 손질해서 반찬으로 올리는 건 진짜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브로콜리를 이유식 할 때 처음 돈 주고 샀다. 나는 진짜 안 좋아했다.
방법이 없을까? 아이도 어느 순간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타고난 거지."라고 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누굴 닮아서 저렇게 편식이 심하지"(아이 아빠가 편식 대마왕이었다)하고 손을 놓아버리는 건 아닐까? 나는 엄마니까 포기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좀 긍정적으로 변화를 도울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글을 시작하기 전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20대 어느 날 단식원에 들어간 적이 있다. (거창하게 수행을 하거나 살이 빼고자 했던 건 아니다.) 속해 있던 동아리 활동의 하나로 1박 2일 단식을 해 본 것이다. 꼬박 24시간을 단식을 했다. 정확한 과정은 생각이 희미하지만 정말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단식을 하는 동안 누워있는 것이 아니다. 가볍지만 몸도 쓰고 공부도 한다. 토론도 하고 음악 활동도 했다. 토론할 때 즈음부터는 모두가 예민해져서 인간 본성의 포악함을 스스로 확인하며 '공복은 정말 위험한 것이구나'를 깨닫기도 했다. 명상도 했었는데 기억이 없다.
진짜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단식 후에 먹은 첫 음식이었다. 속을 살짝 달래고 오이, 당근, 고구마 등의 야채를 한 입씩 먹었다. 여러분은 세 개의 야채 중 무엇에 제일 먼저 손이 갈 것 같은가? 나의 선택은 오이였다. 가장 친숙했고 셋 중 날 것으로 먹어본 경험이 가장 많으니 말이다.
사람은 많았고 인기 있는 오이가 금방 동이 날 것 같았다. 차선책으로 당근을 집어 들었다. 당근에 왜 '당'이 쓰이게 된 것인지 완전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당근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더 기뻤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어 먹어본 고구마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당근의 맛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오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의 채소 편식은 종식되었다. 분명 야채를 안 먹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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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첫째와 함께 남편의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외식을 위해 메뉴를 고르다 보면 밥을 먹기도 전에 아이와 감정 상하는 일이 많다. 대부분 먹기 싫다고 하는 아이와 부딪히는 게 싫어 외식하는 상황을 피하기도 했다. 아직 메뉴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은 조금 더 고민을 해서 새로운 음식을 접하는 기회를 마련해줘야겠다. 언젠가 내가 느꼈던 늘 보던 당근이 아닌 당근을 아이도 만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