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미운 티를 내고 날을 세워봤자, 나만 피곤하다. 미운 사람은 계속 안 좋은 면만 보이고, 예쁘게 보려고 하면 또 좋은 면이 보이기도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거기에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고, 싫어하는 티를 굳이 내서 상대방도 나를 싫어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옛 선조들의 지혜는 이렇게 곱씹을수록 숨겨진 의미가 발견된다. 그렇지만 속담은 속담이고, 내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 같은 말도 누가 하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아는 동생이 ‘누나 결혼 언제 해요?’라고 물어왔다. 오프라인으로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온라인으로 한 달에 한 번 책모임을 하고, 카톡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주고받는다. 내가 대학원을 나와 어떤 직장에 들어가서 어떻게 나왔는지에서부터 내 짝꿍이 누군지까지도 안다. 그 짝꿍과 결혼을 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상황도 아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가 그래서 결혼을 언제 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렇지만 합창단에서 그런 질문을 듣는다면 전혀 다른 맥락이다. 아무런 대화도 나누어 본 적 없는 사람이 ‘무례인 줄은 알면서도’ 굳이 꺼내는 질문이다. 서로에 대해 대략적인 나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에게 그냥 그렇게 대뜸 물어보는 질문인 것이다. 결혼을 언제 하냐는 질문은 같지만 질문을 하는 맥락과 내가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전혀 다르다.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이런 사생활을 그것도 그게 무례한 줄 알면서까지 말을 꺼내는 상황에서는 우선 당황스럽다. 친척들에게도 들은 적 없는 외모나 결혼, 진로나 경력 등에 관한 명절 잔소리 세트를 합창단에 입단한 첫 1년 동안 단원들에게 돌아가며 들었다. 단원들은 한 번뿐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같은 질문을 서른 번 듣는 꼴이다. 이런 상황에서 듣는 ‘결혼은 언제 해요?’라는 질문은 불쾌한 감정과 더불어 이제 그만 좀 했으면 하는 지긋지긋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사람 사이에는 맥락이 중요하다.
자석의 방향에도 맥락이 있다
자석에는 N극과 S극이 있다. 자석 내부에는 작은 자기 쌍극자들이 있는데, 반골기질이 있는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마치 자석에 살고 있는 자기 쌍극자 대부분이 짜장면을 먹는 세상이다. 중국집 사장님은 사실 짬뽕 고수이다. 사람들에게 짬뽕을 맛 보여주고 싶어서, 짬뽕을 50% 할인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저렴한 짬뽕으로 갈아탄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짜장면을 고수한다. 이미 입맛이 짜장면에 적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절반은 여전히 짜장면을 먹고, 나머지 절반은 짬뽕으로 갈아탄다. 즉, 반대 방향의 외부자기장으로 인해 자석이 자성을 잃는다.
중국집 사장님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더 파격적으로 짬뽕을 100원에 판다. 자석과 반대되는 방향의 자기장을 더 강하게 걸어주는 셈이다. 그러면 짜장면을 고수하던 사람들도 마지못해 짬뽕으로 넘어간다. 이제 모든 사람이 짬뽕을 먹는 세상이 되었다. 즉, 외부자기장으로 인해 자석의 자성이 반대로 바뀌었다. 이제 중국집 사장은 자신의 짬뽕 실력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짬뽕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즉, 외부자기장이 사라졌다. 그러면 일부 사람들은 다시 짜장면으로 돌아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짬뽕을 먹는다. 짬뽕의 맛에 눈을 뜨고, 짬뽕의 맛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다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게 만들려면, 이번에는 중국집에서는 짜장면을 100원에 파는 행사를 해야 한다. 그러면 모두들 다시 짬뽕대신 짜장면을 먹게 된다. 이처럼 자석에는 기억효과가 있어서, 외부의 자기장에 따라 자성을 잃기도 하고, 자석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사람도 자석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자석의 세계에서는 중국집에서 아무런 할인 행사를 하지 않으면 이전에 먹었던 메뉴를 따라먹듯이, 사람도 같은 상황에도 기억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좋은 맥락 만들기
이렇게 물질의 특성이 맥락을 가지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생각해 보면 온도에 따른 물의 상태는 맥락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체가 된 물을 액체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온도를 다시 낮추면 된다. 그러면 수증기는 100℃에서 다시 액체 상태인 물로 변한다. 물은 똑같이 100℃에서 액체가 기체가 되고, 기체가 액체가 된다. 얼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0℃에서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또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 만약에 물이 0℃에서 얼음이 되고, 20℃에서 녹아 다시 물이 된다면, 한 번 눈이 내리면 봄이 지나 여름이 올 때 까지도 눈이 녹지 않아 교통이 마비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 만든 눈사람은 여름이 올 때까지 녹지 않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다.
이처럼 물은 같은 온도에서는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은 같은 온도도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봄은 포근하게 느껴진다. 겨우내 낮은 온도에서 지내느라 몸이 추운 데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2023년도 5월의 하루 평균 기온은 19.5℃였다. 이때에 느끼는 날씨는 따뜻함을 넘어 조금은 덥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다르다. 2023년도 9월의 하루 평균 기온은 23.7℃였다. 5월보다 기온은 높지만 9월은 시원하게 느껴지고, 조금만 온도가 내려가도 서늘하다고 느낀다. 기온은 똑같지만, 이전에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니깐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어쩌면 좋은 맥락을 만들어두려는 선조들의 지혜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기분이 상하더라도, 좋은 맥락이 꼭 내게 좋은 일로 돌아오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어도 최소한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테다. 지금 떡 하나 더 줌으로써, 나중에 정말 기분이 상하고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쩌면 조금은 완충 작용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지금 당장의 내 감정이 아닌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까지 고려한, 선조들의 깊은 뜻을 담은 속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