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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해 Oct 15. 2024

안정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과거에는 나이가 차면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그 반대이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본값으로 여겨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90년대생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온 부모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공감대가 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고, 결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중학생 시절부터 알던 짝꿍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기로 했다. 우리 연애는 참 다사다난했다. 내가 짝꿍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연락을 주고받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사귀기 시작했다. 그 뒤로 헤어지고 사귀고를 반복했다가, 이번에는 안 헤어지고 잘 만나고 있다. 헤어질지 말지를 갈등하는 수준의 헤어짐이 아니라, ‘이제 정말 끝이야!’라며 서로 각자의 인생을 살던 헤어짐이었다. 그 사이에 각자 연애도 하고,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군대도 다녀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만나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유머코드였다.


나는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내 짝꿍은 산업경영공학과를 졸업했다. 둘 다 이과감성이 투철하다. 겨울철 얼음이 얼은 길에서 마찰력을 떠올리고, 밤하늘의 달을 보며 지구와 달의 위치를 말한다. 식당에 웨이팅이 있으면 통계를 활용해서 테이블당 인원 수와 대기팀의 수를 기반으로 예상 대기 시간을 예측한다. 수학 공식을 유도하는 유튜브 영상을 서로 공유하고, 불확실한 단위의 정의를 찾아보고 서로 알려준다. 누구를 만나도 이런 이과식 코드가 맞지 않았다. 그럴 때면 이 친구와 낄낄대던 순간이 아쉬워졌다.


대학교 1학년 당시에는 연애를 할수록 서로 다른 점들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안 맞는가 보다 하고 헤어졌다. 그러다가 이 친구의 유머코드가 그리워 대략 6년 뒤에 내가 용기를 내어 연락했다. 그런데 그때도 잘 안되었고, 그러고 나서 3년 정도 흐른 뒤에 만나서는 (물론 헤어짐의 위기가 여러 번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잘 만나고 있다. 결혼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 사람과 계속 보고 살 거라면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최초의 연애 시작으로부터 대략 10년이 넘는 세월을 봐왔더니 이제 서로 관대해졌다. 세상을 조금 더 살다 보니, 어릴 때에는 이해되지 않던 서로의 삶의 방식에도 조금은 동조를 하게 되었다. 거기에 어떤 모자란 행동을 해도 10년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안정상태에 접어든 관계를 보자니, 보다 안정적인 에너지가 낮은 곳을 찾아 지난한 탐색의 여정을 거쳤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에너지가 낮은 곳을 찾아내는 일은 많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낮은 에너지를 향해서


물리학자들은 어떤 문제를 수식으로 표현한다. 밝혀내고 싶지만 아직 모르는 값은 미지수로 두고, 미지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들로 수식을 써 내려간다. 이 수식을 이렇게 저렇게 조물조물하면 우리가 알고 싶던 미지수에 어떤 숫자가 들어가야 하는지 찾아낼 수 있다. 물리학과에서는 미지수가 포함된 다양한 수식을 어떻게 푸는지 배운다. 대학에서는 대부분 풀이법이 밝혀진 문제를 배우지만, 대학원에 가면 아직 풀이가 밝혀지지 않은 문제를 풀거나, 새로운 문제의 풀이법을 찾아낸다.


사과 한 박스에 30개의 사과가 있을 때, 하루에 사과를 2개씩 먹는다면 며칠 후에 사과 한 박스를 다 먹겠느냐 하는 간단한 문제 같은 경우에는 사칙연산을 이용해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푸는 문제는 이보다는 좀 더 복잡하다. 문제를 푸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에너지가 낮으면 안정적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풀이법이 있다.


물체는 에너지가 더 낮은 곳으로 움직인다. 경사로에 공을 두면, 공은 아래쪽으로 굴러내려 간다. 제주도에는 신비의 도로 또는 도깨비 도로라 불리는 도로가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경사의 아랫 방향이 아닌 윗 방향으로 공이 굴러간다. 공이 경사의 아래쪽으로 굴러간다는 통상적인 개념과 반대되기 때문에 신비 또는 도깨비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착시현상으로, 실제로는 도깨비 도로에서조차 공은 더 낮은 위치로 굴러가고 있다.


제주도는 사람보다 훨씬 커서, 사람에게는 높이의 차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럴 때 공이 안정적인 위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을 굴려보면 된다. 그러면 공은 또르르 굴러가다가 어느 골짜기에 안착할 것이다. 그렇게 안착하면 물리학자들은 우선 그 지점이 우리가 찾는 값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해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공을 살짝 건드려 보면 된다.


공을 톡톡 건드렸는데, 공이 그대로 여전히 제자리이면 진짜 해답일 확률이 올라간다. 그러니깐 일단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데, 그 사람과 가끔 투닥거리는 일이 있어도 관계가 유지된다면 그래도 관계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좀 더 올라간다. 그런데 관계에 언제나 작은 갈등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럴 때에도 과연 공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 


공을 크게 뻥 찼는데도 공이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러면 그 자리는 진짜 해답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만큼 골짜기가 깊으니 큰 충격에도 관계가 유지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공이 언덕을 넘어간다면, 그건 그 관계가 그 만한 충격을 견딜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공이 언덕을 넘어가면 그 뒤로 관계가 다시 굳건해질지, 아니면 서로 새로운 인연을 찾아 나설지는 모르는 일이다.


더듬더듬


관계의 지평을 한눈에 꿰고 있다면, 이런 지난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수 있다. 눈으로 보고 가장 낮은 위치에 공을 갖다 놓으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누구와 얼마나 잘 맞을지 모른다. 그러니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며 나와 상대방이 가진 에너지 지형에서 알맞은 위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관계의 지형에는 여러 가지 방향이 있어서 내가 안정적이더라도, 상대방에게는 불안정한 상태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더듬더듬 해결책을 찾는 방식에는 여기가 정말로 제일 안정적인 위치인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다만 지금까지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에 가장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답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일에는 시간이라는 큰 자원이 들어간다. 게다가 탐색 시간을 무한정 늘린다고 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적당한 때에 멈추어야 한다. 그 ‘적당한’ 때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문제를 마주한다. 혼자일 때는 굳이 마주할 필요가 없던 문제도 둘이기 때문에 마주해야 할 수도 있다. 연애할 때의 문제와 결혼한 뒤에 겪는 문제는 또 다를 수 있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문제들도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 보아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탐색을 하기도 해야겠지만, 어느 정도는 상대와 나 자신을 믿고 도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도전의 끝에도 여전히 함께할지 아니면 각자 새로운 인연을 찾기 위해 떠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우선 지금은 탐색을 멈춰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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