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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걷는 여자 Apr 09. 2020

찌질했던 과거로 타임리프를 했다

Glow 7번째 주제 - 과거



아들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비밀 얘길 하나 하마.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모태솔로 팀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성인이 되던 날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된 팀은 여자 친구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런던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랑스러운 여인 메리에게 첫눈에 반한 팀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꿈에만 그리던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타임리프의 맹점이 드러나며 완벽했던 상황들이 하나둘 엇갈리기 시작하고 팀은 그 안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타임리프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이라 손꼽히는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 줄거리이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보며 결국 ‘내가 온전히 관여할 수 있는 시간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한 편으로는 '만약 내가 타임리프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순간을 되돌리고 싶을까?


  

 한참을 생각해봐도 덜어내고픈 순간이 번뜩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지금껏 겪어온 모든 순간에 십분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과거 어떤 순간의 나를 딱히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후회의 생채기에는 언제나 깨달음의 새살이 돋아났고 무수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성장을 거듭해왔기에. 좌절하고 기뻐하고 고뇌하고 행복하던 그 모든 순간의 집합체가 지금의 나이기에 모 시간 모 순간의 나를 특별히 바로잡고픈 생각은 없다.

 하. 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도 물론, 타임리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돌아가고픈 순간이 있다. 찌질했던 나의 과거를 잠깐 리와인드해볼까.






 때는 바야흐로 열일곱, 깨발랄했던 여고생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학기가 시작할 때쯤이었을까. 당시 이과반과 문과반의 벽을 허물고 친해진 친구가 하나 있었으니, 나는 그녀를 늘 양캥이라 불렀다. 그 나이께의 여고생들이 으레 그렇듯, 우리는 별다른 이유 없이 친해졌고 방과 후 운영되는 교내 독서실에서 종종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기분 좋게 투닥이곤 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제법 싸늘한 독서실 마룻바닥에 꽁지발을 들고 내 자리로 향하던 나는 정체불명의 초록빛에 발걸음을 멈췄다. 선연한 초록빛이 뻗어 나오는 저곳은 분명 율곡실 구석, 내 자리였다.

 후다닥 달려가 본 그곳에는 초록빛 에이포 용지가 책상 한가득 붙어 있었다. 수많은 편지들이 독서실의 노란 핀 조명을 받아 당당히 초록빛을 산란하고 있는 광경이란! 떡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 생각도 못한 채 친구들의 편지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읔고 달려온 양캥은 어깨를 툭 치며 큭큭 웃었다.


“어때? 상상도 못 했지?"


나는 콧물을 킁 들이키며 대답했다.


“야, 이게 뭐야! 너 이런 거 언제 준비했어!"


 예상치 못한 감동에 눈물 콧물을 짜낸 그날은 그래, 나의 생일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일 선물을 받았으니 모름지기 그에 걸맞은 보답을 준비해야 하는 법.

다음 해, 이번에는 양캥의 생일이 다가왔다. 나는 B4용지를 예쁘게 꾸민 다음, 양캥 주변 친구들에게 몰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아냈다.

다음은 선물이었다. 평소에 그녀가 습관처럼 사자 필통을 사고 싶어 했던 것이 떠올랐다. 곧장 인터넷 검색에 돌입했다.


 그녀가 갖고 싶다던 사자 필통을 찾아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값비싼 필통의 가격이었다. 이렇다 할 용돈도 없던 그 시절 고딩에게 있어 3만 원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루를 꼬박 고민하며 온 인터넷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다. 다행히도 적당한 가격의 사자 필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주문하면 양캥의 생일에 딱 맞춰 물건을 받아볼 수 있으리라. 망설임 없이 주문하기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지, 그땐 몰랐다. 정품 사진을 당당히 걸어놓은 그 사이트가 사실 이웃 나라에서 대충 만들어낸 가짜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는 걸. 세상 물정 모르던 여고생에게  MADE IN CHINA를 살피는 치밀함 따위는 없었다.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했다. 미리 사놓은 포장지에 선물을 포장하기 위해 택배 상자를 뜯었다. 아니, 근데 이게 뭐람. 인터넷에서 봤던 풍성한 사자 갈기는 온 데 간데없고 허섭한 주황 털들이 제멋대로 뭉쳐 있었다. 아, 망했다. 다급한 마음에 필통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제야 몸통 아래 붙어있던 택이 눈에 들어왔다. MADE IN CHINA. 아놔, 진짜 망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연신 '망했다'를 외치고 있던 그날은 양캥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필통을 포장했다. 차라리 다시 주문할 생각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날의 나는 어리석게도 그렇지 못했다.

 결국 문제의 사자 필통은 이튿날, B4 편지와 함께 주인에게 전해졌다. 선물을 전하던 당시 상황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만큼은 잊을 수 없다. 나는 떳떳지 못한 행동을 하는 내가, 그렇다고 솔직할 용기도 없는 내가 몹시 찌질하다 생각했다. 소오름 돋을 만큼.

 이런 내 속을 알 턱 없는 양캥은 선물을 받아 들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웃음이 가슴에 사무쳤다.


  

 시간이 흘러 찌질했던 여고생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그 날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찌질한 나를 두 번 다시 마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진정성에 대한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우직스레 걸어왔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이쯤 됐으면 잊힐 법도 하건만 그날의 기억은 지독하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예고 없이 불쑥 떠오르는 아찔한 추억은 나를 늘 민망함에 몸서리치게 했다. 물론 당시의 경험이 '진정성의 가치' 깨닫게 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부끄러운 과거는 변함없이 부끄러웠다.

  고심 끝에 타임리프를 결정했다. 좋아, 현실판 어바웃 타임이다. 찌질했던 과거의 나를 바로잡을 시간이었다.




 졸업 후에 연락이 끊겼으니 거의 10년 만이던가. 양캥에게 불쑥 메시지를 보냈다.



양캥 잘 지내?



 오랜 동창의 갑작스러운 연락이 당황스러웠을 텐데 '네가 나의 버킷리스트'라느니 '과거의 뭐시기'라느니, 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도 그녀는 흔쾌히 귀한 시간을 내어주겠다고 했다.

 성공적으로 약속을 잡은 후, 필통 찾기에 돌입했다.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한 결과 그녀가 쿼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장 삼 일 전만 하더라도 형체를 알 수 없는 쿠키 사진과 함께 쿼카 모양 쿠키를 굽다가 망했다는 피드가 올라와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쿼카다.



 그 길로 바로 쿼카 필통을 검색했다.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고 만족스러운 상품을 주문했다. 그에 어울리는 포장지와 예쁜 쇼핑백은 물론이었다. 작은 쪽지도 적어 넣었다.

 이로써 모든 타임리프 준비가 끝났다.






 과거로 돌아가는 그날이 왔다.

 속이 답답한 날이면 한 번 씩 찾곤 하던 고등학교 시절 추억의 거리로 나섰다. 타임리프 하기에 딱 좋은 오늘의 약속 장소였다. 한산한 그곳에서 양캥을 만났다.

퇴근하자마자 달려왔다는 그녀와 새로 생긴 스파게티 집에 들어섰다.


 많이 놀랐지?



 나의 한 마디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당연하지, 내가 버킷 리스트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슨 버킷 리스트라는 건지 짐작도 안 되더라."


하며 큭큭, 익숙한 옛 모습 그대로 웃었다.

나도 따라 웃다가 이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대체 이게 뭐야?' 하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를 보며 해묵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찌질했던 과거의 나부터 오늘의 하자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말을 듣는 동안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던 친구는


"야,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나는 그 필통 마음에 들었었어."


라며 힘주어 말했다.


"아니, 그래도 나는 늘 그게 마음에 걸렸어. 그 당시에 너한테 선물을 주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이제라도 제대로 된 선물을 하고 싶었어, 물론 찌질했던 그날을 완전히 되돌릴 순 없지만."


"야, 난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 어쨌든 이렇게 나를 기억하고 새 필통도 선물해준 건 진짜로 너-무 감동이다. 아, 맞아! 나 그때 네가 줬던 필통 아직도 가지고 있어. 오래되긴 했지만 네가 준거라 차마 버리진 못하겠더라고."


"헐, 너 그걸 아직도? 야 내가 더 감동....!”


.

.

.

.

.

.

.

.


 그렇게 필통으로 트인 수다의 물꼬는 고교 시절의 추억들과 동창들의 근황을 거쳐 직장 생활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흘러간 10년을 천천히 거슬러 오르며 지난 세월을 오래도록 더듬었다.


과거와의 화해, 타임리프, 성공적.




 

 오랜 시간 가슴에 걸려있던 불편한 과거를 바로잡은 것은 어바웃 타임의 타임리프도, 철저한 외면도 아니었다.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부끄러운 어제를 돌아볼 용기와 진심을 담은 한 마디였을 뿐.



이제는 불현듯 찾아오는 그날의 기억에 더 이상 쭈뼛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 하자 리스트, 오늘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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