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가을 조울증이 재발했다. 영어회화전문강사로 다니던 초등학교의 1학년 여선생이 예뻤다. 한 여자가 예쁠 때 조울증이 발병했고 재발했다. 나의 마음을 이미 알지만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수차례 경험으로 면역이 되어 있었다. 학교의 내 책상에는 업무가 쌓여 있었고, 내일 당장 해야 할 수업이 있는데,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손가락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고, 성격이 모질지 못해 실패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비록 실패를 했더라도 극단적인 선택까지 갔다면 그것은 치료가 필요한 위험 상황이다. 명백한 조울증 증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부모님도 짝사랑 때문에 잠시 그런 것이지 집에서 좀 쉬면 괜찮을 줄 알았다. 집에서 놀던 나는 어차피 사회생활 안 하고 노는데 마지막으로 정신과 약에 의존하지 말고 조울증을 극복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동두천의 두레수도원에 가서 10일 금식을 했다. 처음 몇 주는 영혼이 맑아지고 정신건강을 회복한 듯 보였는데, 그 후로 3개월도 되지 않아 조증이 재발하여 붕 떠서 엉뚱한 곳에 내가 가진 돈을 전부 쓰고 다녔다.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입원까지 갔다. 조울증 병증은 잡혔는데 내 정신과 영혼은 빈집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명상센터 옹달샘의 건강치유 프로그램에 보내주셨다.
어찌어찌하여 모든 참여자와 스태프 앞에서 내가 지은 시와 그 시로 만든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자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내가 사랑을 했던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프고 병들어서 여기 명상센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사연을 나누었다. 모두들 큰 박수로 나를 응원해 주었다. 코로나19 이전이었던 그때는 사감포옹이라는 명상센터 옹달샘의 문화가 있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명상센터 옹달샘의 직원을 아침지기라 불렀다. 내가 시와 노래를 나눈 그 밤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침지기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꼭 안아주었다. 내 머리가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어 오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움직임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불수의근인 심장이 오해를 하여 지 마음대로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명상 프로그램 중에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회복하고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다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꾸고 있는 작가의 꿈은 거기서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작가의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작가로서의 재능을 비칠 때 사람들은 감동했다. 작가로서 사는 것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꿈을 나누는 시간에 나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도원 작가님은 내가 언젠가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데 몇 고비 산을 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축복과 조언의 감사한 말씀이었지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말씀이었다.
그때 옹달샘에서 지은 노래 있었다. 전체 모임이 아니라 소그룹 모임에서 발표했다.
길을 잃고 헤매이다
깊은 산속 옹달샘 옆
매트 깔고 요가하는
선녀님을 난 보았네
인기척에 하늘 선녀
깜놀하여 날아갈까
길을 찾는 토끼 시늉
바위 뒤로 난 토꼈네, 토!
우리끼리 산행을 하면서 발표했기 때문에, 밖으로 그 시가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시에 의미를 아는 눈이 밝은 참가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아파서 빛을 잃은 내가 빛나던 아침지기에 비하여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들 그냥 듣고 흘려버렸다. 보통 이런 노래를 살짝 흘리면, 무책임한 묻지마 사랑의 짝대기를 놓아주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다. 빛 잃은 나와 빛 나는 아침지기 사이에는 일종의 신분적 계급이 있었다. 아무도 사랑의 짝대기를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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