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함 Mar 01. 2021

어린 시절

어느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응애 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의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다. 어느 정도 자란 후 기억만이 남아있기 마련인데, 어린 시절 가장 최초의 기억 중 하나가 있다. 어머니께서 산타할아버지께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어머니께서는 매일 잠자기 머리맡에서 성경 동화를 들려주셨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솔로몬 왕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찾아오셔서,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소원을 말해봐'하고 말씀하셨다. 우리 시대에는 램프의 요정 지니 대신, 소녀시대가 나타나 '소원을 말해봐' 노래 불러주었다. 솔로몬 왕은 금은보화 대신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솔로몬 왕은 당대에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다. 나는 솔로몬 왕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혜를 달라고 대답했다. 그 응답인지 가족과 이웃들에게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랐다. 스물한 살 조울증에 걸려 20대 30대 청춘을 바보처럼 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내 에미마는 내가 클레버 clever 하다고 말한다. 순수했던 내가 세상과 사람 이면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나의 의식도 15도 비틀리고 틀어져지혜로움이 영리함으로 변형되었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예수님만 섬기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대학생이 되어 세속문화 가운데 살아가면서 20대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었고, 세상은 요지경이고 내 인생은 이지경이 되면서 절대자 신의 존재는 없다고 결론 내린 30대 때는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10대 때 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이 되는 것이 꿈은 아니었다. 목사님이 되는 것도 수많은 장래희망 중 하나의 옵션이었지만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자체였. 목사님이 되는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한 수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부부교사로서, 용인의 초등학교에서 같은 학교 선생님으로 만나셨고, 결혼하시면서 수원에 터를 잡으셨다. 어머니께서 출산하실 때 곁에서 돌보아주신 큰 이모 댁이 있는 서울이어서 서울의 유명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시고 산후조리하신 서울을 고향이라고 할 수는 없고, 내가 어린 시절 자라난 고향은 수원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부모님께서 전근을 가셔서 영흥도와 백령도 섬 생활을 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1기 신도시 평촌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에 갈 때 즈음 부모님께서 평촌 아파트를 파시고 수원 아파트를 사셔서 고향 수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대학 다닐 때 학기 중에는 학교가 있던 춘천에서 자취하며 지냈다. 연어처럼 고향을 찾아 돌아온 것은 아니었고, 오래도록 아파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 울타리에 기대어 살아왔기 때문에, 부모님이 이사 다니실 때마다 같이 움직였다.


어머니께서는 학교 선생님으로서 직장 생활하시는 것보다, 나와 동생을 손수 키우시고 싶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도 안 가시고 평생 가난한 농사꾼으로서 3남 4녀를 키우다. 장남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아직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는 할아버지께 도움이 되어 드려야 했다. 우리 집안만 그렇게 살았던 것 아니었고,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우리 집안도 가난했지만, 다 같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부부교사셨던 부모님의 교사 봉급 또한 지금과 달리 얼마 되지 않는 박봉이었다. 어머니께서 할아버지께 직장 그만두고 우리를 손수 키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럼 형제들은 어떻게 키우고 공부하냐? 안 된다." 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며느리 입장을 고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어머니께서는 왜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을까, 그냥 어머니 아버지 두 분께서 상의하여 결정한 후에 우리를 키웠을 걸 하셨다. 동생은 10대에 나는 20대 30대에 인생의 큰 방황을 했을 때,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우리를 직접 키우시지 못했던 것이 한으로 남으셨던 것도 같다. 우리 집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 시절 대한민국 시대상이 다들 그렇게 살았다. 우리 집도 가난했지만, 그때는 다 같이 가난했었다.


어머니께서는 학교 선생님보다는 나와 동생의 엄마로 살고 싶으셨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직장에 다니셨고,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학생이었던 어린 고모를 조카들 돌보라고 우리 집으로 보내셨다. 할아버지 생각과는 달리 어머니 입장에서는 어린 시누이가 집에 와서 우리를 돌보는 것이 당연히 마음에 편치 않으셨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출근하시던 어느 날, 나는 아파트에서 1층까지 따라 내려와 어머니 바지를 잡고 통곡하며 울었다. 한 번 안아주었더니 떨어지지 않고 울었고, 안쓰러우셨던 어머니께서는 그 이후로는 안아주고 싶어도 안아주시지 못하셨다. 하루는 어린 내고 학교 가시는 어머니께 문방구에서 사표를 사 오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 학교 가실 때 자지러지게 통곡하며 울다가도, 어머니 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고모랑 잘 놀았을 텐데, 어머니께는 그런 내가 안쓰러우셨다. 다른 아이들은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는데, 나는 어디만 가면 어머니 치마폭을 붙잡고 집에 가자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강했나 보다. 이성에 눈을 뜨면서 사랑하는 한 여자에 대한 애착이 다른 평균의 남자들보다 강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보다는, 한 사람과의 친밀한 애착을 필요로 했다. 지금도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람은 변한다. 그 느린 변화의 속도감 때문에 변화의 과정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단절을 느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부모님께서 발령을 받으셔서 가족이 함께 섬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에는 오지 벽지 점수가 있어서, 섬이나 산골에 있는 오지 학교에 가면 점수를 받아서 승진에 유리했다. 자녀가 어릴 때 시골살이하면 정서교육에 좋을까 싶어서, 젊은 부부교사 선생님들이 자녀가 어릴 때 오지에 다녀오고는 했다. 3학년 때 1년 영흥도에서 살았고, 그 이후 3년 동안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살았다. 영흥도는 지금은 다리가 연결이 되어 대부도와 선재도를 경유하여 차를 타고 들어가지만, 그 당시는 배 타고 들어갔다. 백령도는 군인 반, 주민 반인 섬으로, 대한민국은 멀고 북한은 가까운 섬이다. 북한이 바로 코 앞이라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북한 주민의 이동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시골의 순수한 정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주시고 싶어, 겸사겸사 섬에 들어가신 부모님의 결정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섬에서는 어머니께서 옆에다 붙들어 두고 공부를 시키셔서, 초등학교 내내 1등 2등을 앞다투었다. 한 학년에 반이 하나고, 시골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백령도에서도 외지에서 일 때문에 온 부모님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했다. 섬 토박이라도 어부나 농부가 아닌 군인이나 KT KBS 등 공기업의 직원들의 자녀가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께서 옆에 끼고 다달학습 이달학습과 전과를 가져다 놓고 학교 진도에 맞게 완전학습을 시켰기 때문에 학교 시험에서 틀릴 게 없었고, 어머니께 옆에서 말 잘 들으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부자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그럴 환경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더 효과적으로 더 많은 시간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고 강제하지만 말이다. 부모가 재벌이라도 본인이 공부 안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없다. 초등학교 부부교사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어느 정도 타고 난 유전자와 머리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른 데 정열을 쏟느라 일찍이 경쟁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다른 무엇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0대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고, 20대에 발하는 사람이 있고, 30대에 발하는 사람이 있고, 40대에 발하는 사람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40대부터 인생의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섬이라서 1등 2등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양의 중학교에서 입학 전에 초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으로 본 반 배치고사에서 도시 아이들과 경쟁하여 전교 7등 정도 했었다. 배치고사 성적표를 나누어 주고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실 때 들으신 내용이다. 물론, 중학교 첫 중간고사에서 바로 전교도 아니고 반에서 10등권으로 떨어졌다. 중학교 내내 반에서 10등을 맴돌았다. 반에서 10등권 학생들이 모인 고등학교에 가서, 반에서 10등권을 맴돌다 졸업을 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비평준화 시절이어서, 고등학교에 원서 넣고 시험 봐서 들어갔다. 반에서 10등은 공부를 못한 것도 잘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반에서 10등과 그때 반에서 10등은 많이 다르다. 지금은 학급 당 학생 수가 20명에서 30명 사이고, 그때는 한 반에 50명 가까운 콩나물시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닌 평촌고등학교를 좋은 학교라고 평가받았지만, 공부 못하는 학교도 안 하는 학교도 아니었지만, 전통적인 명문고등학교까지는 아니었다. 안양 과천 지역에서 신흥 명문고로 떠오르는 평촌 신도시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였다. 학교에서 우리 아파트가 횡단보도로 길 하나 건너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 이상 좋은 학교가 없었다. 집이 코 앞이었고, 일진도 없었다. 공부를 못하거나 안 하는 학교도 아니었고, 중학교 우등생만 모여 쌍코피 터지게 경쟁하는 명문고도 아니었다. 명문고는 아닌데, 학교 이미지가 좋아서 사람들은 우리 학교를 새로 떠오르는 신흥 명문고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무겁게 들고 다녔고, 쉬는 시간에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았고, 손에서 팬을 놓지 않았지만, 영혼은 다른 곳으로 가출해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공부벌레 노력파라고 했지만, 논 것도 아니고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의식은 다른 데로 흘러가는 채로, 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가득 가지고 다녔고, 쉬는 시간에도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교과서나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하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가요 대신 찬송가와 기독교 음악과 동요와 클래식을 듣고 불렀다. 어머니께서 대중가요 대신 교회음악과 클래식과 동요를 좋은 음악이라 생각하시며 들려주셨고, 나는 어머니 말을 잘 들었던 착한 어린이였기도 했지만, 그때는 가요가 재미가 없었고 교회음악인 CCM이 재미있었다. 혼자 길을 다닐 때도 교회음악 CCM을 부르며 다녔지만, 반 짝꿍인 친구가 이어폰 끼고 헤비메탈을 들으면, 한쪽 이어폰을 귀에 꼽고 함께 듣기도 했다. 어른이 되고 한참이 되고 착한 남자에서 조금 나쁜 남자가 되었을 때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담배 피우는 친구들과 술 먹고 놀 때 같이 담배를 피웠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길거리에 동냥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서 주었다. 잘 걷지 못하고 목발을 짚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부축을 해 주었다. 언젠가 집에 갈 차비가 없는 지저분한 거지를 만났는데, 집으로 데려가 씻기고 먹을 것을 주고, 주머니의 가진 돈을 털어 보낸 적도 있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었는데, 비닐봉지 들고 동네 길에 나가서 스스로 쓰레기를 주워 담아 동네 청소를 했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결벽주의자는 아니었다. 세상과 이웃에 선한 일을 하고 싶었다. 나의 꿈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과도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나를 존경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호기심 많은 같은 반 친구들은 야한 잡지 야한 동영상을 돌려 보았다. 지금은 야한 동영상 야동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아직 인터넷이 발달되기 이전이라, 동영상이란 개념 이전에 비디오테이프가 주요 영상기록 매체였다. 친구들은 비디오테이프 라벨지에 「수학의 정석」 같은 제목이 쓰여 있는 살색 비디오를 돌려 보았다. 권장할 사항까지는 아니지만 청소년 발달과정 가운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친구들이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갔다. 친구들이 선생님 안 계실 때 노골적으로 야한 것들을 돌려볼 때, 나의 손가락은 자동반사적으로 두 눈을 가렸고, 자동반사적으로 손가락 사이가 다른 의미로 벌어지고 굳게 감은 눈은 보일랑 말랑 슬쩍 떠졌다. 노골적인 야한 잡지는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도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았다. 대신 집에 어머니 책꽂이에 꽂혀 있던 서양 고전 명화집의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야한 누드 명화를 몰래 꺼내 보았고, 어머니께서 집에 돌아오시기 전 원래 각도 그대로 꽂아 두었다. 다 벗어젖히는 노골적인 야한 콘텐츠는 나에게 별 감흥을 주지 않았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오기 같은 야한 예술에서 소년이 필요로 하는 성적 에너지를 충전했다.


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주변의 어른들 가운데서도 나를 존경하는 분도 계셨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시선이 있기에, 나를 스스로가 외톨이가 되었던 왕따였었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다. 깊이 친하게 친구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지내기를 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싶었고,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를 바랐다. 만인의 연인은 아니었지만, 만인의 이웃이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자처럼 생각하는 아버지 영향 아래 자라나, 착한 어린이 착한 청소년이었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착한 남자일 때도 있고, 나쁜 남자일 때도 있다. 여전히 대외적 이미지는 착하다. 내가 예전에는 착한 남자였는데 지금은 때에 따른 나쁜 남자라고 하면 지금도 충분히 착한 남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내 속을 까 뒤집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속을 아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지만, 특별히 무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친구들과 잘 지내려고 했다. 왕따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우리 학교는 일진도 왕따도 없는 학교였지만, 어디에서나 스스로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영혼이 있다. 개인이 사회를 왕따 시키는 것 또한 어떤 의미의 왕따이다. 내가 착해서 소위 왕따들의 친구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상속해 주신 DNA와 성장환경이 그런 강박을 주었던 것 같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는 아니다.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집단 괴롭힘으로 조울증이 시작되어, 인생 중 가장 찬란해야 할 2030 청춘 20년을 잃어버렸지만, 현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아팠던 나를 사랑해 준 아내 에미마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서 올해 9월 2세 출산을 앞두고 있고, 동생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며 돈을 벌고 있다. 퇴근 후에는 글을 계속 쓰고 있으며 책 출간을 위해 도전하고 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갈 수 있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 손에 든 것이 아무도 없지만, 아내 에미마와 뱃속의 아가와 함께하는 지금이 좋다.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언젠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가난할 때도 평생 사랑하며 함께 갈 수 있는 인생의 파트너 아내 에미마와 뱃속의 아가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아무것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사실 상 백수였던 나는,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되기 위해 동생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고 있다. 퇴근 후에는 책을 내서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호구지책도 해결하고자 도전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다시 추억해 보는 것은, 더 이상 찬란했던 어제를 아 옛날이여 하고 되씹으며 살아가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 내 평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고, 내 평생에 가장 찬란할 순간은 앞으로 걸어갈 미래의 꽃길이다.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옛이야기를 회상해 보는 것은 아니다. 더 찬란할 나의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 온 나의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해 보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번 왔다 갔다 했지만, 결국 오늘 카드를 수령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