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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7. 2021

사랑지상주의자, 사랑꾼 되다

나는 사랑지상주의자였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인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 오혜성이 엄지를 자신의 인생이 파멸하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나는 예수님도 까치 오혜성도 아니었고, 소녀도 엄지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소녀 이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내 에미마를 빼고는 그랬다.


첫사랑의 단추를 잘못 끼웠고, 상사병과 조울증에 걸린 남자를 내가 사랑했던 어떤 여자들도 연민은 할지언정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다. 최근에는 좀 다른 생각을 해 본다. 나와 인연이 아닌 여자들은 사랑했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을 여자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눈이 높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다수에게 이성으로 매력적인 스타일은 아니지만, 소수에게는 매력적인 스타일이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사랑은 내가 쫓아야 할 꿈도 목적도 아니다. 내 삶을 살다 보면 따라오는 것이다.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다.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다 보면, 사랑과 결혼 연예와 섹스는 따라오는 거지, 그것을 쫒아야 할 대상은 아니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사랑은 중요하지만, 더 이상 사랑을 쫓아가지는 않는다. 내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에세이 작가로서 내 글의 주요 테마가 사랑인 것이지 사랑이 더 이상 내 인생의 꿈과 목적은 아니다.


더 이상 나는 사랑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사랑꾼이 되었다. 사랑지상주의자의 인생의 꿈과 목적은 사랑이지만, 사랑꾼에게 사랑은 인생의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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