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0년 1월 11일 군대에 입대했다. 1월 10일이 생일이고, 그다음 날이 입대일이었으니, 입대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해 봄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렸고, 그해 6월 제대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내 클라우드에 이력서가 남아있으면, 이력서에 군 제대일이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 검색해 보았는데, 찾은 단 하나의 이력서 파일에는 그런 기록은 적혀 있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기록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네이버 검색을 해보았다.
'군 경력증명서'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는데, 이를 공식적으로 '병적증명서'라고 부르나 보다. 병적증명서 발급 안내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병무청 홈페이지의 안내 페이지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바로 발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부24 홈페이지에 가라는 안내와 링크가 있다. 구 공인인증서인 공공인증서가 아니더라도, 여러 민간 인증으로 인증이 가능하다. 공인인증서를 폐지하고 다양한 인증을 도입한 정부의 노력이라기보다는, 공인인증서가 공동인증서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구 은행 공인인증서가 정부 홈페이지 인증에서 그대로 쓰였는데, 코로나19 예방접종이나 국민 지원금 신청 등등 때문에 민간 인증서가 정부 주요 인증에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육군에서 이병 이등병으로 제대했고, 병과가 1111로서 소총수 보병이었고, 2000년 1월 11일 입대하여 같은 해 6월 26일 제대하였고, 전역 사유가 의병 전역으로서 질병으로 의가사 전역하였다. 기록을 통하여, 오늘에서야 나는 6월 26일 제대한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625 다음날 626이니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제대하고 반년 집에서 쉬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1년 봄학기 복학을 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학교에 가지 않을까 봐서 자취나 하숙 대신에, 기독교 선교단체 CCC에 찾아가서 대표간사님을 만나서 CCC 기숙사에 나를 넣어두었다. 군대 가기 전 1학년 때 심심하면 학교를 째고 그랬지만, 그냥 당시 다른 공부 안 하는 1학년 남학생들 그 정도였다. 최소한의 출석일수는 지켰고, 리포트는 짜깁기를 해서라도 냈고, 시험은 아무말대잔치라도 시험지를 채워 넣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F 몇 개 받았을 뿐 학사경고를 받지도 않았다. 조울증이 발병하고 난 이후에는 그 스케일이 달라졌다. 몇 학기를 학사경고 정도가 아니라, ALL F로 통으로 날려버렸다. 2001년 봄학기와 가을학기가 그랬다. 부모님은 항상 나를 믿어주셨고, 나중에서야 사실을 알게 되시면 학교를 휴학시키고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2001년에는 아직 집을 떠나 멀리서 나홀로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조울증을 관리하고 조절할 능력이 내게 없었을 때였다.
2002년에는 집에서 쉬면서 파리바게트에서 알바를 했다. 빵 이름과 가격을 잘 외우지 못해서 점주에게 많이 혼났다. 동생이 아르바이트하던 파리바게트였는데, 동생은 일머리가 있어서 일을 잘해서 사랑받았는데, 나는 일머리가 없어서 일을 못해서 구박을 받았다.
2003년이 되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나를 춘천 학교로 혼자 보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한창 젊은 애를 그냥 놀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를 숭실대 전산원에 보내주셨다. 숭실대 전산원은 학점인증제 기관으로서, 학점은행으로 학점을 따면 인정이 되어서 전문학사 학위도 받을 수 있었고, 대학으로 편입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학점을 인정받으려면, 강원대 학적을 포기를 했어야 했는데, 강원대는 욕심이 나지 않았는데, 영어교육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전산원 동기 학생들과는 다르게 일단 학점 인증은 받지 않고 학원처럼 다녔다. 나중에 강원대 영어교육과 학적을 버리게 되면, 전산원 학점을 그때 등록해서 인정받기로 했다. 전산원에서는 성적이 톱을 달렸다. 집에서 다녀서 그랬는지, 모범적으로 잘 다녔다. 부모님께서 보실 때도, 이제 춘천의 학교로 돌아가도 되겠구나 생각이 드셨나 보다.
2004년에는 1학기 학점 평점이 3.92가 나올 정도로 잘했다. 1학기 때 학점이 좋아서, 2학기 때는 3학점을 더 들을 수 있어서 24학점을 채워 들었고, 그해 여름 계절학기 6학점 겨울 계절학기 6학점 꽉꽉 채워 들었다. 1년을 파리바게트 아르바이트하면서 놀고, 1년을 전산원 다니면서 공부하면서, 정신적으로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다.
2005년 교회를 옮겼다. 학교 앞 교회를 떠나서, 우리 학교에서는 멀리 있는 춘천교대 쪽문 뒤에 있는 교회에 갔다. 춘천교대 학생이 가장 많은 교회는 아니었지만, 춘천교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수 사역을 하는 교회였다. 춘천교대 학생이 아닌 성인 집사님 장로님도 계셨고, 나와 같은 강원대 학생도 있었지만, 춘천교대생 중심의 교회였고, 나는 그런 교회라서 갔다. 춘천교대 여학생을 만나서 사귀러 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잘 될 리가 없었다. 더더욱이 짝사랑과 군대에서의 실패로 조울증에 걸린 나에게 잘 될 리가 없었다. 교회에 가자마자 좋아하는 교대생이 생겼지만, 그 여학생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의 실패로 조울증에 걸렸고, 사랑이 실패할 때마다 조울증이 재발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나에게는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2005년 2006년 1학기는 그럭저럭 선방했고, 2학기는 ALL F 였다. 부모님께서 뒤늦게 사실을 아시고, 나를 다시 휴학시키고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때까지는, 군병원에 처음 입원했던 것을 제외하면, 입원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내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겉돌았을 뿐,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도 그때는 치료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조울증으로 붕 뜨지 않더라도, 정신이 산만해져 학교에 안 가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이면, 정신과 전문의 주치의와 진지하게 상담을 해 볼 필요가 있다.
2007년 한 해 쉬고, 2008년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그냥저냥 선방했다. 사실, 2009년 봄학기 봉사활동 한 과목과 교생실습 한 과목만 남겨두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교생실습 가라고 양복도 사 주셨다. 그런데, 2009년은 내 인생에서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그해는 몇 번이고 길에서 객사할 수도 있었던 만큼의 위기를 넘겼다. 교생실습을 앞두고, 나는 교생실습을 가기는커녕, 자퇴를 하고 등록금을 일부 반환받아서, 그 돈을 다 써 버렸다. 조울증이 심각해지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쓸뿐더러, 돈이 있는 곳을 귀신 같이 알아 찾아서 돈을 다 쓴다. 사채를 써서 엄청난 빚을 내서 며칠 만에 다 쓰는 사람도 있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가산까지는 아니고, 내 돈과 부모님께서 내 이름으로 넣어두신 등록금이나 아파트 청약을 깨서 쓴 정도였다. 조증이 가장 심했을 때 한 텀에, 수천 까지는 아니고 수백 정도 썼다. 그 정도면 다른 환자들에 비해 양호한 것인데, 나의 증세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의 최대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수천 수억 수십억을 내가 가지고 있었더라면, 나도 며칠 안에 그 돈을 다 깨 먹었을 것이다.
다행히 부모님께서는 바로 그 사실을 아시고, 등록금 내고 재입학을 해놓는 동시에 휴학을 해두셨다. 그해 봄 여름 가을 나는 대형사고를 쳤다. 첩첩산중 계곡에서 혼자 하루 종일 방황하다 겨우 빠져나오고, 길에서 노숙하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 기억이 나는 부분도 있고, 기억에 없는 부분도 있다. 2009년 가을 나는 처음 군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한 이후로 처음으로 조울증이 재발해서 정신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3개월 정도 입원하고 퇴원했는데, 상태가 아직 온전치 못해 분당서울대병원에 2주 정도 다시 재입원했다. 입원 병원 중, 환자 입장에서, 일반 정신병원은 지옥이고, 대학병원 급은 천국인데, 천국은 워낙 비싸서 나와 같은 중산층 서민의 자제들은 엄두가 안 날 정도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넉넉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대학병원이나 좋은 병원 갈 생각하지 말고, 일반 입원 병원에 입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 돈 엄청나서 감당 못한다.
2010년 2011년에는 집에서 쉬면서, 당시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던 카페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말이 카페 매니저였지, 카페 손님이 많이 없어서, 음악 들으면서 커피 내려 마시며 쉬는 시간이었다. 어쩌도 손님이 오거나, 부모님 아시는 지인들이 오면, 그때 잠깐 커피를 내고 말이다.
그리고 2012년 봄학기, 드디어 교생실습 한 과목 만을 남겼다. 한 학기에 교생 한 과목이어서, 통학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자취를 하거나 모텔 달 방을 빌려 생활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강원대 후문 근처이자, 내가 교생실습 나갔던 고등학교 정문 근처에 고시원이 있었다. 고시원은 보증금 없이 한 달 단위 계약이 가능하다. 2012년 봄 여름 나는 춘천의 고시원에 살며 교생실습을 마쳤다. 교생실습 끝나고도 한동안은 집에 바로 내려가지 않고, 고시원에서 노가다를 하며 살았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노가다를 한 것이고, 아주 오래 한 것은 아닌데, 2주인 14일 동안 토요일 일요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노가다 막노동에 나갔다. 노가다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쉬고 싶은 날 쉬고 일하고 싶은 날 일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일하면 돈 못 번다. 눈 비 오고 아픈 날이 쉬는 날이고, 그 나머지는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가리지 않고 일해야 돈 번다. 실제로 그렇게 일하는 아저씨들이 많이 있다. 딱 2주 14일이었지만, 처음 노가다 나간 날로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14일을 연짱 노가다 나갔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기억한다. 옥을 캐는 옥광산에도 들어갔고, 춘천 네이버 데이터 센터 공사현장에도 들어갔고, 콘크리트를 까는 현장에도 갔다.
부모님과 내 주변에서도, 학과의 교수님들도, 그리고 나 자신도, 그리고 내가 갔던 학교의 담당 선생님도, 내가 교생실습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교생실습을 모범적으로 잘 마쳤다. 99학번이 2012년 8월 여름에 졸업을 했으니 교수님께서도 최대한 편의를 봐주셨겠지만, 누가 보아도 나무랄 것 없이 최선으로 잘했다. 교생실습 학점도 A+이 나왔다.
2012년 8월 나는 13년 반 만에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내가 그렇게 오랜 기간 시간과 돈을 버리고 대학을 졸업한 것은 내 인생의 실패이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하여 대졸 학력과 중등학교 영어과 정교사 2급 자격을 취득한 것은 내 인생의 쾌거이기도 하다. 물론, 현재 학력과 전공과 자격을 살려 경제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