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향한 첫사랑은 7년 갔고, 아리따운꽃을 향한 두 번째 사랑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 갔다. 나의 세 번째 사랑은 아리따운꽃이 여전히 내 마음에 있었던 2006년에 시작되었다. 아리따운꽃과 같은 교회를 다니며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2005년 1년뿐이었고, 아리따운꽃은 교대를 졸업하고 춘천을 떠났다. 아직 내 마음속에 두 번째 사랑이 떠나지 않았을 때 내 마음에 들어온 세 번째 사랑은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이었다.
나의 세 번째 사랑은 여배우 한효주였다. 연예인을 향한 팬심을 가졌던 아니라, 여자로서 한효주를 나 홀로 사랑했다. 아프로디테의 비극은 아크로폴리스의 남신과 영웅만 아프로디테를 보고 침을 꿀꺽하는 게 아니라 개나 소나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껄덕대는 것이다. 그 수많은 개나 소 중 한 마리가 나였다.
나는 청소년 때도 연예인을 따라다닌 적이 없었다. 나에게 연예인이라면 변진섭이 부른,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로 시작하는 '희망사항'을 작사 작곡한, 피아니스트 겸 가수 노영심 하나 정도였다. 노영심이 나보다 13살 연상이나, 내가 대학 1학년이던 1999년에는 33살이었으니 꽃 다운 나이였다. 1999년 노영심 피아노 콘서트를 나 혼자 갔다. 내 친구 중 노영심 콘서트를 돈 주고 갈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효주가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은 2006년 드라마 『︎봄의 왈츠』︎때였다. 가을연가 겨울동화 여름향기 봄의왈츠 윤석호 PD의 사계 시리즈 가운데 낮은 시청률로 망작이었으나, 해외시장에 판권을 선판매하여 윤석호 PD의 사계 시리즈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나에게 드라마 『︎봄의 왈츠』︎는 한효주를 처음 만난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한효주에게 편지나 선물을 보내거나, 소속사 주변 카페에 죽치고 서성거리거나, 한효주 소속사에 직원으로 취업할 방법을 찾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효주를 여자로서 진지하게 사랑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조증 과대망상 중 하나일 수 있을진대, 그때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인 줄 알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이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거나 조울증이 재발하지는 않았다.
내가 한효주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유일한 시도는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국내 정상급 작가가 되면, 한효주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08년 봄학기 국어국문학과의 소설창작 시창작 문학 수업을 들었다. 물론 지금의 작가의 꿈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이전이었지만, 지금 꾸는 작가의 꿈이 시작한 것은 한창 후인 2015년이었지만, 작가의 꿈을 처음 꾸게 된 것은 한효주를 향한 길을 놓기 위해서였다.
한효주를 향한 길이 열리면,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하고, CGV에서 영화 한 편 보고, 청량리에서 정동진 해돋이 열차를 타면 되지 싶었다. 생각은 항상 쉬우나, 생각의 실현은 늘 어렵다. 한효주는 나의 이상형이었다. 한효주 전 나의 이상형은 '그 순간 사랑하는 여자'였으나, 한효주 후 나의 이상형은 '예쁘고 착한 여자'가 되었다.
아내 에미마를 사랑하게 된 것은, 에미마가 '예쁘고 착한 여자' 여서는 아니었다. 에미마가 '나를 사랑하는 여자' 였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인생이 꼬이고 슬펐던 나의 이상형은 마침내 '나를 사랑하는 여자'가 되었다. 물론, '나를 사랑하는 여자' 에미마는, '예쁘고 착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