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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속옹달샘 옆 매트 깔고 요가하는 선녀님을 보았네

by 최다함

2015년 봄이었다. 고도원의아침편지를 쓰시는 고도원 작가님께서 충주에서 운영하시는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옹달샘에 갔다. 어머니께서 명상센터 옹달샘의 건강치유 프로그램 녹색뇌프로젝트에 보내주셨다.


2014년 새로 옮긴 학교의 1학년 여선생이 예뻤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이미 알지만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집에서 놀던 나는 어차피 사회생활 안 하고 노는데 마지막으로 정신과 약에 의존하지 말고 조울증을 극복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동두천의 기독교 수도원에 가서 10일 금식을 했다. 처음 몇 주는 영혼이 맑아지고 정신건강을 회복한 듯 보였는데, 그 후로 3개월도 되지 않아 조증이 재발하여 붕 떠서 엉뚱한 곳에 내가 가진 돈을 전부 쓰고 다녔다.


결국 강제입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정신병원 3개월 동안 조증은 잡혔지만, 3개월 동안 몸무게는 5Kg가 늘어있었고, 눈의 빛을 잃고 퇴원 후 내 작은 방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냈다. 한창 청년의 때에 그러고 있으니 어머니 속이 타 들어가셨고, 큰 고모 추천으로 나를 명상센터 옹달샘에 보내주셨다.


프로그램 자체는 훌륭했다. 정신이 육신의 집을 가출하여 멍했던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을 뿐이었다. 프로그램보다 오래간만에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았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 참가자 가운데 몇 명과 무리를 이루어 옹달샘 뒷산을 오르내리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최 선생, 외우는 시 한 편 있으면 읊어봐요. 아니면 노래 한 곡 부르던지."

"외우는 시나 노래는 가사는 없고요. 제가 오래전에 지은 시가 하나 있는데요. 그 시로 만든 자작곡 노래도 있는데요. 그거 해 봐도 될까요?"

"당연히 되지요. 더 좋지요."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
작은 우물 하나 있어
물 대신 사랑 흐르고
물고기 대신 희망 노닐고

나의 마음에 어느 숲에는
푸른 소나무 한 그루
향내 나는 솔잎 위에는
솔벌레 한 마리 꿈틀꿈틀

해님 아파 눕고
달님 눈물 흘려
그 어느 따스한 숨결
찾아 느낄 수 없던 날들

그 얼음바람의 다스림에도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
반짝이는 별 하나 있었으니
나 그 별님 하나를 사랑했네


"브라보"


그날 밤 프로그램은 고도원 작가님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아 각자의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함께 산을 올랐던 무리들이 내가 지은 시와 노래가 좋다고 들어보자고 했고,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해 보라고 멍석을 깔아주셨다.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자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앞에 나가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니 듣는 청중보다 내가 더 뜨거워졌다. 내가 사랑을 했던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프고 병들어서 여기 명상센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사연을 나누었다. 모두들 큰 박수로 나를 응원해 주었다.


코로나19 이전이었던 그때는 사감포옹이라는 명상센터 옹달샘의 문화가 있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명상센터 옹달샘의 직원을 아침지기라 불렀다. 내가 시와 노래를 나눈 그 밤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침지기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꼭 안아주었다. 내 머리가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어 오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움직임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불수의근인 심장이 오해를 하여 지 마음대로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명상 프로그램 중에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회복하고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다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꾸고 있는 작가의 꿈은 거기서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작가의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작가로서의 재능을 비칠 때 사람들은 감동했다. 작가로서 사는 것이 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꿈을 나누는 시간에 나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도원 작가님은 내가 언젠가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데 몇 고비 산을 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축복과 조언의 감사한 말씀이었지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말씀이었다.


2주 간의 녹색뇌프로젝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옹달샘에 다시 와서 1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청년 자원봉사를 했고, 옹달샘에서 가는 동유럽 지중해 15박 16일 명상치유 여행도 따라갔다. 고도원 작가님을 보러 간 게 아니라, 아침지기를 보러 갔다. 옹달샘에 있는 동안 여러 개의 노래를 작사 작곡해 발표했다. 옹달샘 사람들은 좋아했다.


파리도 사랑을 하는데
파리 파리

엉덩이 큰 파리 위에
파리한 파리 올라앉아
파리 파리

파리도 사랑을 하는데
파리 파리


하이얀 명상복에
노오란 잠바떼기
만 입어도
왜 그리 예쁘니

하 도대체 넌
정체가 뭐니


옹달샘에서 작사 작곡한 뭐 이런 노래들이 옹달샘에서 히트를 쳤다. 내가 노래 하나를 만들어 부르면 그다음 날 옹달샘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옹달샘에서 처음 작사 작곡한 노래는 따로 있었다. 이 노래는 옹달샘 명상 프로그램 중 10명 남짓의 소모임에서 한 번 부르고, 내 마음속에 나 혼자만의 노래로 묻었다.


길을 잃고 헤매이다
깊은산속옹달샘 옆
매트 깔고 요가하는
선녀님을 난 보았네

인기척에 하늘 선녀
깜놀하여 날아갈까
길을 잃은 토끼 시늉
바위 뒤로 난 토꼈네 토


옹달샘을 떠나기 전날, 아침지기에게 고백을 했고, 아침지기는 우리가 그런 인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 단정 짓지 말고 결론을 열어 놓자고 했고. 아침지기도 그러자고 했다. 마지막을 멋있게 매듭지었고, 어쨌든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열어놓았는데, 이미 나의 멘탈은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다. 그 끝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결국 나의 정신은 미끄러졌고, 질척댔고, 그렇게 끝나버렸다.


세월이 한창 흐른 후에, 아침지기도 결혼하여 아내와 엄마가 되고, 나도 아내 에미마와 결혼하여 남편이 된 후, 아직 요한이가 우리에게 오기 전이었다. 자서전 쓰기 워크숍이 있어 옹달샘에 갔다가 마당에서 마주쳤다. 아침지기는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는데, 나는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워서 서둘러 피해 갔다. 원래 계획은 혹시라도 우연히 만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그동안의 안부를 멋있게 물어보는 것이었는데, 젠장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인사만 간단히 하고 꽁지를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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