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회사에 정직원으로 취직하여 출근하기 전이었다. 아침 7시 즈음 마루에 나와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여, 밤 10시가 되어서야 노트북을 닫고 아내와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막대 걸리질을 하고, 옷을 개어 정리할 때를 빼고, 하루 종일 글을 썼다.
스물한 살에 걸린 조울증으로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모든 조울증 환자들이 특별한 직업 없이 나처럼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하여 몇몇 조울증 환자들은 그렇다.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나는 다방면에서 재능이 많고 어떤 면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마땅히 어디 가서 돈을 벌 직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놀았던 것 또한 아니다. 동생 실용음악연습실 사업장 일을 돕고, 정년퇴직하시고 귀농하셔서 왕대추농장을 하시는 아버지의 노후 귀농생활을 도왔다. 정해진 시간 출근하고 퇴근하고, 정해진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 직장이 없었을 뿐이었다.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했던 것도 아니다. 조울증에 결려 대학을 늦은 나이에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라고 비정규직 영어교사를 하다가, 다시 조울증이 재발하여 경력이 단절된 나로서는, 내 안에 잠재된 재능과 능력과 상관없이 딱히 취업할 회사가 없었을 뿐이다.
네팔에서 결혼을 하고 아내가 한국에 오는 수속을 밟으며 네팔에서 신혼생활을 하다가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그 이후 아내 에미마와 부모님과, 주중에는 논산 시골집에서 왕대추 농사를 지었고, 주말에는 수원 아파트에서 쉬었다. 아버지께서는 정년퇴직하시고 스물한 살 나이에 시작된 조울증으로 특별한 직장 없이 살아온 나를 위해 평생직장을 만들어 주시려고 왕대추농장을 시작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노후생활을 곁에서 함께 해드리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따라다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재취업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도시보다 시골에서 땀 흘리며 농부로 사는 게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셨다.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노후생활을 곁에서 함께 보내드리면서, 농장 일은 해가 뜨겁지 않을 때 잠깐 하고, 시골집 마루에 노트북 앞에 앉아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고 책을 펴내고 YouTube를 하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처음에는 내가 글을 써서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현실 불가능한 뜬구름 잡으러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잠깐 쉴 때 취미로만 하기를 바라셨다. 글쓰기 활동으로 내가 이루어 낸 크고 작은 성과들을 보셨다. 내 글들을 읽어 보시고 작가로서의 재능과 가능성을 보셨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나의 작가로의 꿈을 응원해 주시지만, 그때만 해도 내 앞에서 직접 이야기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2019년 왕대추 농사 1년 차라서 많은 소출은 나지 않았지만, 왕대추 작황이 좋아 맛있고 모양이 예뻤다. 아버지께서는 향후 왕대추 농사의 비전을 보게 되셨다. 첫해 왕대추 농사가 잘 되니까, 아버지께서 우리 부부가 시골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농사 규모를 키워 볼 꿈을 꾸셨다. 아버지께서는 낙관적으로 보셨지만, 나에게는 비관적으로 보였다. 현재 농장 규모로는 왕대추 수확의 정점에 이르러도 손익분기점이나 최저임금 정도의 순수익을 내는 것도 쉽지 않고, 농장규모를 키우면 청년 창업농에게 정부에서 초저리로 농업자금을 대출받아야 하는데 빚쟁이가 돼야 하는 것이었다. 농사를 짓는 주변 분들은, 내가 청년에 해당되어 청년 창업농 정부 대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 그 돈을 대출받아 논을 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조울증으로 시작한 방황과 사회 부적응으로 40 평생 특별한 수입 없이 부모님의 용돈 받으며 살아왔던 나로서는, 수입과 자본도 제로였지만 빚 부채도 제로였다. 내가 보기에 초저리로 정부자금을 대출받아 농지를 확장시켜도, 총수입만 늘어날 뿐 순수입은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평생 빚쟁이가 되는 것으로 보였다. 빚이라도 땅을 사는 것이라서 나중에 팔아도 되고, 빚도 일종의 자산이고, 당장 빚을 안 값아도 농민들에게 정부가 빚 갚으라고 독촉하지도 않고, 농사를 지으면 수익이 안 나고 빚을 지게 되어도, 열심히 땀 흘려할 내 일이 있고, 일평생 밥은 먹고살 수 있다는 논리인데, 평생 용돈 받아 생활해 온 나로서는, 단 얼마라도 빚을 지며 사는 삶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능력과 재능이 있어도 취업할 직장이 없을 때 도움을 받으며 사는 비루한 삶은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의 빚 외에는 평생 빚을 질 능력조차 없었던 나로서는 마흔 나이에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논산 시골집 왕대추농장을 떠나게 된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면 새벽부터 밤늦도록 소처럼 일해야 하는 전업농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글을 써서 작가가 되는 꿈은 접어야 했다. 나는 반 귀농 반 귀촌으로 취미로 농사를 지으며 논산과 수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요양하면서, 본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방향을 보니까, 아침부터 밤늦도록 쉬지 않고 소처럼 일해야 하는 전업농으로 가고 있었다. 평균의 작가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려고 작가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작가로 아주 잘 풀리면 농업으로 잘 풀렸을 때와 소득 자체의 규모가 다른 것이었다. 어차피 돈이 안 되는 것은 소농으로서의 농사꾼과, 처음 시작하는 작가는 비슷했다. 매일 쉬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농사를 짓나 작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쓰나, 지금 당장은 부모님 용돈을 타서 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농사가 잘 되어도 수입에 한계는 있고, 그 수입으로 겨우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것이니,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수입이었다. 작가는 처음에는 수입이 없지만, 그것 또한 농사도 매한가지이고, 잘 풀리면 그 수입의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작가로서의 내 꿈은 아주 잘 풀린 극소수의 작가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은 심히 미약하여 수입 제로이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여 계산이 되지 않는 상상할 수 없는 수입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요행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는 원래 글 잘 쓰는 뛰어난 작가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기획을 하면 되는 것이고, 출판사와 에디터와 작가가 함께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기획하고 편집하고 마케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출판이란 것이 일단 책을 내보고 독자의 반응을 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베스트셀러는 원래 베스트셀러로 기획된 책 중에서 한 권이 되는 것이고, 스테디셀러는 원래 스테디셀러로 기획된 책 중에서 한 권이 되는 것이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는 그렇게 기획된 책 중에서 한 권이 터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다 보니 베스트셀러가 된 책과 작가도 있지만, 베스트셀러의 상당수는 원래 베스트셀러 만들려고 기획한 기획작품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나에게 희망사항이기도 하지만, 스물한 살 때 조울증이 걸려서 근 이십 년 간을 무능하게 살았던 내가, 한순간에 잃어버렸던 내 삶을 되찾고 역전 만루 홈런을 날려야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와 그 작가로 나 자신과 나의 책을 기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9년 12월 말일 수원고용센터에 찾아가서 구직활동 상담을 했고, 2020년 1월 정초부터 취업성공 패키지에 참여하여 직업상담과 직업훈련을 받았다. 직업훈련을 받아 취업하려고 구직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단 직업훈련이라도 받는 다고 어디엔가 적을 걸어 두어야지, 주변에서 나를 가만히 두고 글을 쓰고 묶어 책으로 출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가 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어요."라고 위장막을 치기 위해서 구직활동을 한 것이었다. 이 또한 나의 오산이었다. 4개월 동안 주 5일 하루 8시간 학원에서 공부하고, 아침 2시간 저녁 2시간 총 4시간 정도 버스와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 앱으로 블로그 글을 쓰고, 앱으로 유튜브 영상 편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시간이 없었다. 딴마음으로 직업훈련을 시작했지만, 직업훈련받는 동안에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성실하게 임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나,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또는 주말에, 별도로 추가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하루 8시간 학원에서의 공부는 성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참여하였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서, 나의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하였고, 같이 훈련에 참여하였던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 자신만 놓고 보았을 때 없던 디자인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직업훈련을 마친 후에 구직활동으로 이력서를 뿌렸는데, 면접이라도 한 번 보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TO는 꾸준히 있지만, 워낙 인력풀이 많아서 1명 뽑는데 20명 이상의 지원자가 원서를 낸다. 경력 무관이라고 쓰여 있지만, 경력자가 당연히 우대받을 것이다. 여기서 경력 무관이라는 것은 신입이라도 회사에 들어와서 배우면서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경력자 이상의 능력을 가진 슈퍼 신입은 검토해 보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경력자가 없으면 그중에서 쓸만한 신입이라도 뽑겠다는 것이다. 예체능 계열 전공자를 우대한다는 것인데, 미대생이나 시각디자인 전공자가 지원하면 뽑겠다는 것이다. 내 나이 마흔 하나인데 사장이나 팀장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경력직이 아닌 신입으로 뽑아줄 리도 없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과 인디자인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원하는데, 전반적인 툴 사용법은 알지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회사라도 입사해 밑바닥부터 경력을 쌓으면, 그 이후에는 출판 편집디자인 분야에서 계속 경력을 쌓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면접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직업훈련을 받고 구직활동을 하면서, 취업불가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1인 출판사 창업도 생각해 보았다. 1인 출판사는 집으로 사업자 등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소자본으로 창업을 할 수 있기는 한다. 그렇지만 책 한 권을 만들어 서점에 내놓을 때마다 상당한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무실 임대료와 인건비와 작가 인세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내가 지금 당장 또는 경력을 쌓은 뒤에든 1인 출판사를 창업하는 이유가, 출판사 사장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내 글을 쓰고, 책을 내고, YouTube를 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주로 내 책을 찍으면서, 내 책을 내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김에 기획출판이든 자비출판이든 주변의 다른 사람의 책도 찍어주는, 그런 1인 출판사를 해볼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인쇄와 물류창고는 파주 출판단지에 맡기고,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집에서 커피 마시며 혼자 하는 그런 1인 출판사를 생각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나는 최소한의 액수로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는 소자본도 아니었고 무자본이었다. 사무실은 별도로 얻지 않고 집에서 하더라도, 책을 인쇄하고 창고를 빌려 보관하기 위한 돈이 있어야 했다. 전문인력에 맡기지 않고 나 스스로 발품 팔아서 한다고 하더라도 추가되는 최소한의 마케팅 비용도 있고 말이다. 처음 책 한 권 대박이 나서 그다음 책 찍고, 두 번째 책에서 나온 수익으로 세 번째 책을 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출판사 아니라 작가가 되는 것인데, 내 책 꾸준히 내기 위해 출판사를 만들어 출판사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책도 만들어 준다면, 글 쓰는데 집중하는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평생직업이 꼭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일과 후에 글을 쓰고 책을 펴내 작가 활동을 평생 해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하였든 지금 현재로서는 취업불가 창업 불가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작가가 꿈이라면 지금 당장 글을 쓰고 책을 내고 YouTube를 하기로 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될 길을 지금 바로 걷기를 했다.
2015년 충주의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의 건강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그 프로그램 기간 동안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밖으로 끌어내었다. 사람들에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 전업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동생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면서, 작품 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어차피 백수였고 내가 일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아파서 못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이해할 때였다. 어차피 돈 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용돈 타서 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지금은 동생이 자신의 가게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때는 동생이 나를 오랜 시간 쓸 상황도 되지 않았다. 동생은 나를 필요로 했지만,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 번씩 가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주고 청소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주변의 저항에 부딪히더라도, 아무 일 하지 말고 글쓰기에만 전념했어야 했다. 아침에 도서관 문 열 때 들어가서, 밤에 도서관 문 닫을 때 도서관에 나와야 했다. 노트북 들고 도서관 책상에 앉아 글을 써서 책을 냈어야 했다.
<녹색 뇌 프로젝트> 이후 명상센터 옹달샘에서 6주 동안 청년 자원봉사를 했었다. 그 이후에도 기한 없이 옹달샘에 남아서 자원봉사를 계속하면서, 저녁 일과 후 옹달샘 도서관에서 글을 써서 책을 냈어야 했다. <깊은산속 옹달샘>과 고도원 작가님의 추천을 받아서, 고도원 작가님께서 책을 출간하시는 '해냄출판사'에서 첫 번째 책을 출간해야 했다. 옹달샘에서 기한 없이 청년 자원봉사를 계속하다가, 옹달샘 직원인 아침지기로 눌러앉아 그곳에 필요한 일을 하면서, 일과 시간 외에 옹달샘 도서관에 가서 노트북 켜 놓고 글을 썼어야 했다.
그해 여름 옹달샘에서 하는 <동유럽 지중해 15박 16일 명상치유 여행>에 695만 원을 내고 참여했다. 동유럽 지중해 여행을 하면서, 열심히 사진 찍고, 체험하고, 글을 쓰고 하여, 나의 첫 번째 책의 소재로 사용했어야 했다. 동유럽 지중해 여행에서 고도원 작가님과 옹달샘 스태프에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 여행이 후에 옹달샘 스태프 아침지기로 일하며 글을 썼어야 했다. 물론, 그때는 메르스 사태로 옹달샘의 손님도 끊겨서 할 일도 없었고, 밥만 축내면서 자원봉사로 남아 있기도 송구스러운 상황이었다. 동유럽 지중해 여행 이후 옹달샘으로 자원봉사로 다시 올라가지 않은 것은, 옹달샘에서 마음이 떠나 다른 할 일이 생겨서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옹달샘을 위해 자원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메르스 때문에 손님이 뚝 끊긴 명상센터에서 밥을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으면 아침에 노트북을 가지고 도서관에 들어가 도서관 문 닫을 때 나와야 했다. 작가가 될 때까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YouTube를 하면 되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면, 당장 작가로서 살면 되었다. 글 쓰고 책 내는 작가가 되기 위해 다른 직업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직장에 들어가 그 직업에 묶이며,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만큼 그렇게 느슨하지 않다.
"오빠도 출퇴근했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이 말은 나에게 취직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아내가 네팔에 살 때는 돈이나 직업이 없어도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믿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직업이 없고 돈이 없이 살아보니, 할 수 없는 게 많고, 많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가 지금 바라는 게 뭔지 언젠가 깊이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아내가 바라는 것이 돈은 아니다. 직업이다. 나이 든 아내이든 한 사람이라도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면, 한국에서 생활하기 충분한 돈은 벌 수 있다고 아내는 생각한다. 아내는 기본적으로 검소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용돈을 타서 쓰니 죄송스러운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것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동생과 부모님의 일을 도왔다. 일을 안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할 일이 없었을 뿐이다. 변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스물한 살 때 조울증이 시작된 이후에 경력이 단절되어 지금은 멀쩡하고 능력과 재능이 있는데도 하고 싶어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아내도 네팔 최고의 국립대학에서 석사까지 한 재원이지만, 새벽 6시에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서, 밤 9시에나 통근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오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불가능한 공장 밖에 일할 곳이 없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직장을 가지 않더라도, 본인이라도 당장 직장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아내 뱃속의 우리 아가 (태명) 사랑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내는 내가 취업을 하더라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스트레스받는 직장이라면 조울증이 재발하면 안 되니 그냥 집에 있기를 바란다. 또 내가 취업을 하지 못하더라도, 본인이 일 할 수 있으면 본인이 벌어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내가 "오빠도 출퇴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말은, 취업을 하여 회사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었다.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마루에서 글만 쓰는데, 하루 8시간만 글 쓰는 일을 하고, 그 외에는 아내 에미마와 시간을 보내며 쉬라는 투정이다. 정해진 시간만 글을 쓰고,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는 이야기이다.
처음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는, 아내와 부모님께서 내가 허망한 뜬 구름을 잡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글쓰기가 직업이 될 수 있고, 내가 글쓰기로 큰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과 아내의 반응에 상관없이, 꾸준하게 일관되게 오랜 기간 동안 글쓰기를 뚝심 있게 밀어붙여 오기도 했지만, 블로그와 SNS 글쓰기로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타기도 하고,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1박 2일 투숙권을 얻기도 하고, 방송작가의 눈에 띄어 연합뉴스 TV 다문화가정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하고, 네이버 블로그로 1년 동안 글을 써서 네이버 애드포스트로 2만 5천 원이 조금 넘는 돈을 확보하는 등, 블로그나 SNS에 쓴 글을 크지는 않지만 상당한 액수의 물질로 교환한 것을 보셨다. 글쓰기가 직업이 되고 그로 인해 빛을 볼 수 있겠다는 것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시는 것 같다. 내가 쓴 글들을 보시고, 내 안에 작가로서의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아내와 부모님께서 이제는 인정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글쓰기를 취미활동이 아닌, 뜬 구름 잡는 활동이 아닌, 나의 일로서 아내와 부모님이 생각한다.
첫 번째 책은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하여, 브런치 공모전을 통하여 출간하려고 도전했다. 오래전부터 계획을 했었던 것이나, 마감일이 11월 1일인데 10월 5일이나 돼서야, 12번 떨어지고 13번째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작가 승인 이메일을 받았다. 그동안 블로그와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에 쌓아 왔던 글이 있지만, 하나의 책의 구성요소로서 각 글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쓰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쓴 글들이어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추고 동어반복과 같은 내용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편집할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첫 번째 책에 들어갈 글 중 다 쓰지 못한 내용들이 있어서, 추가적인 글들을 써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글만 쓸 수 있다면 충분한 시간인데, 그 시점이 부모님 왕대추 수확을 도와드리기로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데드라인을 맞추는 게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마감일을 맞추는 것이 간당간당하게 느껴졌다. 부모님 왕대추 수확을 도와드리는 동안에는, 오전에는 왕대추를 따고, 오후에는 왕대추를 분류하여 박스에 담에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배송을 하고, 저녁에는 상품성이 없지만 맛과 영양은 좋은 왕대추를 잘라서 건조하여 건대추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왕대추 수확을 우선순위로 하고, 지혜롭게 어머니와 아내를 설득하여 글 쓸 시간을 확보하여 여유 시간에 글을 썼다. 왕대추 수확을 앞두고, 장염 때문에 1주일 병원에 입원하고 맹장수술도 했기 때문에, 아내 또한 내가 무리하지 않고 최소한만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아내와 어머니와 아버지 세 분이서 충분히 하실 수 있고, 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때는, 시간을 내서 글을 썼다. 예상했던 것보다 왕대추 수확이 빠르게 끝나서 2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2주 동안은 아침 7시에 마루에 나와서, 밤 10시에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내가 조울증으로 아파왔기 때문에 잠을 많이 자기를 원했다. 학원에 갈 때는 부득이하게 7시에 일어났지만, 학원 다니지 않을 때는 예전처럼 9시 즈음 일어나기를 바랐다. 나는 7시에 마루의 내 글쓰기 공간으로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여, 우리 부부의 공간 방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인간관계가 좋아서 네팔에서는 친구가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나 외에는 친구가 없다. 교회 식구들도 있고, 주일 오후에 다니는 네팔어 예배 네팔 사람들도 있고, 나의 부모님과 친척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는 내가 유일한 친구이다.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같이 있어도, 내가 다른 일들을 하고 있으면 아내는 외롭웠다. 뱃속의 우리 아가 사랑이가 생기기 전에는 더 그랬다. 같은 공간에서 내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하고 있으면, 아내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질투를 느낀다.
아내의스마트폰이 좋지 않아서, 새 스마트폰으로 바꾸어 줄 여유가 생긴 김에, 갤럭시 노트 20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이후에는 아내에게도 좋은 친구 할 만한 성능의 스마트폰이 생겨서, 아내도 폰을 붙잡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내가 모바일만 한다는 타박은 줄어들었다. 그런 의도로 사 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좋은 프리미엄 스마트폰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사진과 영상도 많이 찍고, 틱톡도 하고, 요리 유튜브 만들어 직접 편집해 올리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한 즐거운 삶을 살라고 선물한 것이었다. 좋은 스마트폰을 사주니 내가 다른 일에 몰입하여 아내와 전적으로 함께 해주지 못할 때, 아내에게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생겨서, 아내뿐 아니라 나도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같은 대학 같은 과 같은 학번 동기 가운데, 현재 가장 성공한 친구는 영화번역가 황석희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영화번역가로 황석희가 제일 잘 나간다. 나나 우리 동기들이 아는 황석희는 대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음악과동아리 활동 등에 빠져 있었다. 영화번역가로 명망을 얻게 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한 말도 공부 대신 많은 책을 읽고 혼자 만의 글을 많이 썼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리고 성공한 후에 스스로 고백하기에도 영어교육과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었던 같다.
같은 학과 같은 동기 중에서 두 번째로 공부 안 한 친구가 영화번역가 황석희이고, 가장 공부 안 한 친구가 나이다. 그 친구는 음악이나 동아리 등에 빠져 있었던 것이고, 나는 짝사랑에 빠져 있었고, 조울증에 걸려서 나만의 세계에 빠져 제정신 못 차리고 다닐 때였다. 황석희가 대학 졸업할 즈음에 뭐하고 고민하다가, 프리랜서로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영상 번역을 선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영화 번역이 아닌 미드 같은 영상 번역으로 그쪽 세계에 발을 담갔다. 실제로 영상 번역을 해 보니, 사람 만날 시간도 없고, 영상번역가로서의 자기 감옥에 갇혀 쉴 새 없이 번역을 해야지, 마감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영상번역가도 일종의 작가 일터인데, 작가로서의 삶이 생각처럼 프리하지 않다. 그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 케바케여서, 오피스텔 하나 얻어서 출근 시간 퇴근 시간 맞추어 두고 넥타이 매고 출근해서 글 쓰는 작가도 있을 테고, 햔량처럼 백수처럼 자기가 글 쓰고 싶을 때 필 받아서 쓰고 그 외에 시간에는 놀면서 사는 작가도 있을 테고,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자기 전까지 글쓰기 작업만 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은 두 번째이지만, 현재 나는 세 번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책 한 권도 출판하지 못한, 스스로만 작가로 생각하는 데뷔 전 작가이기 때문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종이책이나 Ebook으로 ISBN을 붙여 발행한 책은 아니지만, 브런치 매거진에 글을 묶어 브런치북 한 권 발행했으니, 작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했다. 당선되지 않았다.다른 출간의 길을 찾고 있다.
"오빠,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면 안 돼요?"
아내의 이 말은 취직해서 회사 가서 돈 벌어오라고 쪼는 말이 아니었다. 나의 오랜 설득에 아내는 이미 넘어오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하여 당장 통장에 돈이 입금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에 7시 일어나자마자 마루로 출근해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다가, 밤 10시 즈음되어서 방으로 들어오는 나의 글쓰기를, 이제는 하나의 일로서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책쓰기로 돈을 벌어와야 진짜 일이 되지만 말이다. 내가 글 쓰는 것이 노는 것이 아니라, 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일로서 이제 아내와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인정하기 시작하셨다. 예전에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사법고시 통과하려고 공부하는 것처럼, 공무원 수험생들이 공무원 되려고 공부하는 것처럼, 나는 작가가 되려고 글을 썼다.
아내가 출퇴근 시간을 정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는 것은, 내가 옆에 있는데도, "심심하다." "외롭다." "놀아달라."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지만, 아내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작은 직장 하나 있는 것이다. 최저임금도 괜찮았다. 내가 그동안 오랫동안 아파와서 어려우면, 본인이라도 벌어와서 나를 먹여 살릴 기세였다. 물론 아직 아이가 생기기전 그런 이야기다. 나도 아이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아이를 나보다 더 훨씬 좋아한다. 우리 부부는 처음 결혼할 때부터, 신혼생활을 단둘이서 오붓하게 즐길 생각보다도, 바로 아이가 생기기를 바랐다.
2019년 말 아기가 생겼다가, 유산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아내는 성격이 밝고 긍정적인데, 나는 아직도 아이가 떠나간 이후 초점 잃고 빈집 같은 아내의 눈빛을 기억한다. 나야 아직 태어난 아기도 아니고, 아내 에미마만 건강하면 괜찮은데, 아이를 뱃속에서 품고 키워왔던 아내의 마음은 달랐다. 지금은 훌훌 털고 잘 살고 있는데, 아내는 우리를 떠나간 뱃속의 아이 Blessing 블레싱이 오래도록 아픔이었던 것 같다.아빠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은 또 다르다.
글을 잘 써서 작가가 되기도 있지만, 생각이 많아서 작가가 되기도 있다. 나는 후자이다. 네버엔딩으로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을 잡아 담기 위해 글을 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떠 오른다. 하나의 생각의 꼬리를 잡아 글로 담으면, 그 생각에서 새끼를 치고 가지를 쳐서 새로운 생각과 글로 전환이 된다. 글로 쓸 좋은 글감이 떠올라서 열심히 쓰고 있는데, 아내가 "오빠. 나랑 놀아요. 6시면 퇴근해요. 심심해요." 하여, 컴퓨터 앞을 떠나고 그 생각을 담아두지 못하면, 그 생각은 나를 떠나서 휘발되고 말아 버린다. 하나의 생각이 휘발되면 다른 생각이 반드시 찾아 오지만, 운명적인 사랑이 떠나면 반드시 다른 운명이 찾아 오지만, 운명은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라서 시간을 두고 참을성 있게 언제 올지 모르는 인연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하나의 글감을 놓쳐 휘발되고 나면 또 다른 글감이 찾아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글쟁이로 살아가는작가라면 항상 소소한 글쓰기의 소재 글감 주제는 있겠지만, 대중과 독자를 끌어당기고 사랑받는글감은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글감은 떠올랐다가도 일상을 살다 보면 잊힌다.
작가도 위대한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 퍼 올릴게 많은 작가도 있고, 자신의 생각이 많아 그 생각을글로 담고 책으로 내는 작가도 있다. 나는 후자이다. 한창 책을 많이 읽었던 '나름' 문학청년일 때도 있었다. 지금은 책을 사는 대신 '밀리의 서재'에서 구독하여 본다. '밀리의 서재'에 없는 책은 전자책으로 나와 있으면 교보문고 앱에서 사서 보는 정도이다. 최근에는 다른 사람의 글을 많이 읽지 않는 편이다. 시간도 없고, 바쁘기도 하고, 관심도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섭렵하고 창작법과 문체를 배우고 익혀서 내 것을 찾아가기에는 내 나이 벌써 마흔한 살이다.
10대 때는 고전과 스테디셀러를 읽고, 2030 때는 지금 교보문고 매대에 깔리는 가장 따끈따끈하고 핫한 베스트셀러를 읽는다면, 40대 이후에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으며, 내 문체로 생각이 흐르는 대로 글을 쓰려고 한다.
한 때 문예 창작법을 다룬 강의도 여럿 쫓아다니고, 책도 여러 권 읽어 보았다. 결론은 정답은 없고, 작가마다 다르지만, 대동소이한창작법이 있기는 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창작법을 배워서, 그 공식에 도움받으면 글을 쉽고 빠르고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트렌드에 맞는 글을 쓸 수 있다. 지금 글쓰기 공식을 익혀서, 그 공식에 맞추어 글쓰기에는 이미 마흔한 살이다.문법 문체 공식을 배워 경쟁력 있는 작가가 되기는늦었다. 글을 잘 쓰는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남의 글을 많이 읽고, 마음에 드는 작가의 좋은 작품을 골라서 필사도 해 보고, 습작을 많이 해 보라는데, 내가 그렇게 해서 빛을 발하기는 너무 늦었다.
나만의 글 쓰는 공식과 구성을 찾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닌, 공장에서 물건을 찍듯 글과 책을 찍어 내고 싶다. 연습과 습작과 모방이 아니라,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하게 떠 오르는 내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 내려간다.
한동안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자러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글만 썼다. 아내의 바람은 마루의 내 글쓰기 공간으로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저녁 6에 퇴근을 하고,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며쉬었으면 했다.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
브런치북 공모전을 앞두고 7시에 출근하고 10시에 퇴근하느라고, 다른 것은 다 손에 내려놓고 공모전 데드라인을 맞추는데 올인했다. 아내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지, 아침부터 밤까지 글쓰기 일을 하면서, 아내가 원할 때 아내와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지, 아직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글을 꾸준히 쓰는 것도, 다 아내와 나의 미래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 글을 쓴다고 해서, 양질의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9시에 출근해서 6시가 아닌 5시에 퇴근해도 되고, 하루에 4시간 씩만 일해도 된다. 좋은 글을 쓰고 책을 내서 독자의 사랑을 받는 게 중요하지, 몇 시간을 글쓰기에 몰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