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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희 Oct 21. 2023

마지막 프로젝트

부산 신도시 상권에 동네 고객을 대상으로 로컬 매장을 연다는 의뢰가 들어왔다. 해당 사업부에서 신규 매장 출점에 관한 계획을 구상하고, 디자인팀에서 기획 의도를 검토하고 그에 걸맞게 공간을 설계하고 고객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요소를 기획하고 구체화하는 업무를 한다. 


10년 동안 리테일 공간을 설계하는 일을 해오면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지금 고객에게 필요한 요구(need)가 무엇인지를 찾고 이를 빠르게 적용하는 데 있다. 주기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유행은 자주 바뀌고 이는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에도 발 빠르게 반영된다. 리테일 환경 역시 이에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고객에게 흥미를 주고, 또 방문하게 끔 하는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게 큰 목표이다. 이 점이 리테일이 주거, 사무실, 호텔 공간을 설계할 때와 다른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기민하게 필요한 요소를 살피고, 빠르게 설계를 하고 구현을 해야 하므로 리테일 공간 변화 주기는 다른 용도를 위한 공간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빨리’ 해내야 하고 

‘타사와 다르게' 차별화를 만들어 내야 해야 하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리테일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꾸준히 달려왔건만,

변화 주기가 빠르다는 것, 고객이 원하는 것을 빨리 찾아내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목적이  어느 순간부터 버거워졌다. 소비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이면에는 의사 결정자의 번복되는 판단과 성과와 매출에 대한 압박으로 원래 하고자 했던 의도 방향에서 비껴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돼도 우리만이 내세울 수 있는 디자인과 차별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는 일에 대해 보이지 않는 실망과 자조(嘲)가 쌓일수록 나는 현실과 이상을 더 구분 짓지 못하는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맡은 일이고 내가 힘든 만큼 월급을 받으니 꾸역꾸역 참아가며 일에 몰두했다. 





부산에 새로운 매장을 열어서 동네 상권을 잡아보겠다는 프로젝트 역시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어진 일이고 해내야 하는 일이므로 책임감을 갖고 참여했다. 기획 의도와 타깃 고객에게 맞게 공간을 분배하고, 각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짜고, 공간 콘셉트와 연결되는 디자인으로 가구와 세부 요소들을 구상한다. 디자이너는 이 과정을 통해서 머릿속에 조각조각 떠 있는 아이디어를 모아서 하나의 집결체로 만든다. 온 힘을 다해 머리를 굴리고, 손으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상상했던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그려낸다. 디자인으로 구현해 내는 과정이 누군가에는 쉽게 뚝딱해 내는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없던 것을 존재할 수 있도록 디자이너들의 많은 노고와 노력이 담겨있다. 


문제는 이런 디자이너 과정의 수고를 쉽게 보는 데 있다. 디자인해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디자이너의 고생을 한없이 너그럽게 봐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디자인이 뭐 대수인가 싶지만, 매출이 잘 나와야 디자인도 잘 된 것이라고 인정되는 분위기에 노출될수록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 가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에 박혔다. 


이런 경우로 여러 번 겪어보고 상대방 눈높이에서 맞춰 설득하고 조율하면서 나름 맷집도 좋아진 줄 알았는데, 충격을 덜 받는 게 아니라 충격을 받은 대로 쌓여만 간 걸까?     

    

5개월 간 진행한 이 마지막 프로젝트로 나는 흥미, 애착, 열정, 분노, 상실, 자책, 실망을 경험했다.  쉽게 진행된 프로젝트는 거의 없었다. 나름에 사연을 앉고 웃고, 울고, 의욕적이었다가, 화를 냈다가, 원망도 했다가, 칭찬도 하기를 반복. 그러고 보니 나는 일을 연애하듯 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속에 너무 많은 자아를 과도하게 일에 투영한 것은 아닌지, 그간 나를 거쳐간 모든 프로젝트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나를 알게 해 준 프로젝트,

동네에서 사랑받는 매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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