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일이다. 어느 날 디자인 센터 장(내가 속한 조직의 수장)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들만 따로 불러 모았다. 우리 회사 디자인 센터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말고도 VMD 디자이너, 제품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들 총 100여 명 디자이너들이 일하고 있다. 직무 별로 따로 소집한 상황이 흔치 않은 경우라서 스무 명 남짓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디자이너들은 회의실 커다란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상무님이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다. 상무님은 직설 화법보다 앞 뒤 말의 맥락적 이해가 필요로 하는 대화법을 즐겨하시는 분이라 다들 그가 하는 말에 어느 때보다 더 귀를 기울였다. 이 날 우리가 들어야 했던 메시지는 이랬다. 하나,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엎친데 겹친 격으로 코로나 여파로 매출은 심각하게 떨어지고 있다. 둘, 소비의 판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고, 향후 매장을 오픈하는 일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일과 일하는 방식은 변해야만 한다.
온라인 매출이 오프라인에서 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오프라인 영역의 위기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매장으로 향했던 몇몇의 고객들은 코로나로 인해 아예 손발이 묶여버렸다. 주요 상권이라고 불렸던 동네, 젊은이들이 모이던 동네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손님 잃은 매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임대료와 같은 기본적인 매장 유지비조차 조달을 할 수 없게 되자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폐점하는 점포들이 늘어갔다. 항상 사람들이 많았던 번화가 텅 빈 그릇처럼 변해갔고, 화려한 불빛을 내뿜던 상점에는 임대 딱지만 덜렁 붙어있었다. 내 가게가 아님에도 텅 빈 점포들을 보면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었다.
회사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변해야 한다는 것을 외면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위기를 잘 넘어 보자도 아니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식 압박이 먼저인 상황이 참 씁쓸했다. 변하는 세상을 막을 수 있겠냐 만은 별안간 ‘쓸모 있음’에서 ‘쓸모없음’으로 취급은 유쾌할 리 없었다. 이것도 빙빙 돌려 말하는 그분의 말을 여러 번 되감기 하면서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버틸 사람만 남고 버티지 못하겠다면 알아서 나갈 준비하는 게 좋겠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돌아오는 대답이 ‘각자도생’이라니. 필요할 때는 요리조리 살펴 어렵게 뽑아서 열심히 써먹더니, 이제 단물은 다 빠졌나 보다. 단물 다 빠진 껌은 빨리 뱉어내고 싶겠지. 수치로 보여주는 성장과 이익 창출만이 인정받는 회사에서 역성장의 지점을 도려내는 일은 당연하다.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취급은 직장인이라면 언젠가는 받을 수 있음을 예상했었다. 다만 머릿속으로 경험한 것과 직접 경험한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때부터였다. 나에게 회사란 무엇이었는지, 회사에서 나의 역할과 존재감이 무엇인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의 성장이 곧 회사의 성장이다’라는 믿음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 필요한 사람과 아닌 사람, 그 사이에 나는 어디쯤 있는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단물이었던 시절, 소싯적 잘 나가던 ‘라테’ 시절을 그냥 지날 칠 수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K-뷰티가 열풍이던 5-6년 전이 떠오른다. K-뷰티 트렌드를 선두 하는 화장품 회사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나는 일이 넘쳐났다. 국내, 중국, 동남아시아에 매장을 오픈해야 하는 일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본사 디자이너로 일하는 나는 매장이 오픈하는 단계까지 디자인 검수를 위해 동남아시아의 국가들과 중국의 여러 도시들로 수도 없이 출장을 다녔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비행기를 타고 지사 관계자와 현지 업체 사람들과 미팅을 하며 매장을 뚝딱 만들어 내곤 했다.
회사는 업계에서 선두두자의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최초, 최고’를 강하게 밀어 붙었다. 오프라인 매장은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고 고객과의 신뢰를 쌓는 실제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공간 역할을 잘 해내야 했다.
회사는 멋있고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디자인 개발에도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우리는 해외 유명한 디자이너와의 협업도 다양하게 진행했다. 글로벌 고객들의 관심과 주목을 얻기 위해, ‘잘’ 그리고 '열심히' 일했다. 일하느라 과한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그래서 힘들어도 성취감과 뿌듯함으로 자발적인 보상이 되던 때였다. 그야말로 오프라인의 황금기였던 시절이었다.
아무 맛도 안 나는 껌 같은 존재에 대한 생각은 없길 바랐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뉘앙스의 말을 듣고 나니, 열패감이 나를 몰아세웠다. 개인의 능력 부재 관점에서 들여다볼 치부도 아니고,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 텐데, 나는 왜 이 자연스러움에 반기를 들고 싶은 거지?
5-6년 전 같았으면 다시 힘을 내고, 잠자고 있던 열정까지 깨워서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파내고 또 파내도 끊임없이 샘솟을 줄 알았던 30대의 열정은 수명을 다했다. 그때의 열정과 불꽃이 그립다. 지금은 다 꺼지고 재만 남은 불꽃인데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40대에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도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출발 선 앞에 섰다. 무슨 열정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아직 감도 잡히지 않지만, 뭐라도 두들기면 뭐라도 잡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