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무게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를 읽고

by 임다희

소설을 읽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책 표지를 다시 봤다. 표지 중앙에는 세로글씨로 소설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가 쓰여 있고, 배경사진으로 모래사장이 있는 바닷가에 거대한 흰 벽이 가로막고 있다. 바다는 말이 없다. 흔적 없이 모든 것을 쓸고 가버린 바다는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을 리 없음을 암시해주는 것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벽이다. 다시 읽다 만 페이지로 돌아가서 소설을 읽는다. 작가가 심사숙고해서 골랐을 글자들은 슬픔의 맥락적 텍스트가 되어 묵직한 무게 추 하나씩 달고 있다. 이 슬픔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작별 또한 영원히 미결이다. 인선은 경하에게 작별에 대해 묻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작별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미완성의 작별을 할 수 없어서 그것을 미룬다는 것인지를.


소설을 읽는 내내, 어깨를 짓누르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힘들었다. 슬픔의 무게 때문에 표정은 옅어지고 감정의 기운은 메말라간다. 따스한 햇볕이 곁들 어도 오랜 시간 슬픔에 잠긴 집은 적막하고 고요하기만 하다. 인선 곁에 아마와 아미의 앵무새 한 짱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슬픔 grief 어원은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ef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것인가? 슬픔의 무게가 가혹할 만큼 무거 워도 살아가려면 감당해내야 하는 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이 무게의 근원은 제주의 비극사건 4.3 학살이다. 이 비극의 생존자는 살아도 비극이었다. 가족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인선의 엄마, 총살 대신 고문과 학대의 피해자였던 아빠. 그들의 고통이 침묵의 세월을 지나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슬픔은 이미 인선에게 까지 닿아있었다. ‘요 아래 실톱’(p.78)을 깔고 자던 엄마를 이해하게 됐을 때 인선은 ‘낮에는 공방에서 나무를 깎고’, 밤이면 ‘구술 증언 자료들’과 ‘오십 년의 봉인 해제된 기록물들’(p.316)을 읽으며 고통의 진실을 마주한다. 두 개 손가락이 잘린 고통으로 부모의 아픔을 대신하고, 뼈만 남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나 아직도 뒤섞인 채 어딘가에 묻혀 있을 뼈들이 있기에 슬픔과 작별할 수 없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이제 닿는 건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p.302)



나에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커먼 바다에 잠긴 슬픔이었고, 한 번도 들어가 본적 없는 바다 깊은 곳의 적막이었다. 작가 의식에 이끌려 나 또한 심해의 암흑 구간으로 더 깊게 가라앉고 있었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치게 부는 돌풍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 외, 현암사) 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슬픔에 젖으려 하지 않는다’고 작가 조앤 디디온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슬픔을 피하려는 이유가 슬픔의 무게 때문만을 아닐 것이다. 가슴 저미는 화제를 드러내놓기를 꺼리는 문화 속에 살아가기 때문 아닐까? 하물며 왜곡된 진실로 오염된 슬픔은 더더욱 환영 받지 못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 슬픔에 더 애정을 가져야 한다. 어려워도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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