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그들에게 경외심을 갖게 된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원이 다른 깊은 울림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 것은 무지(無知)함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조차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p.302) 일들을 계속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어내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우리의 의식을 간과하지 않도록 울림을 주는 자가 있다.
프리모 레비는 누구인가. 그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10개월을 버티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다. 그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이 책에서 자신이 체험한 지옥 같았던 수용소의 나날을 철저히 되돌아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수학했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문학 작가가 되었다. 세계전쟁과 대학살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증언들을 여러 문학작품으로 발표했다.
이 책은 ‘절멸의 수용소’라 불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살아남은 생존자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프리모 레비는 나치의 잔인성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면서 서서히 파괴되고 무력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세세하게 증언한다. 이름 대신 왼쪽 팔뚝에 번호를 새긴 채 수용소에 갇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은 한 번의 손가락 까닥 으로 결정될 만큼 아주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과 판단력이 애초부터 배재된 곳에서 그들은 빵을 먹을 수 있는 가에 대한 집착과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들처럼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인간’들로 취급될 뿐이다. 저자는 암흑 같은 고통의 순간을 당황하거나 놀라는 대신 ‘수조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꿈속의 어떤 장면처럼 모든 것이 고요했다’(p.22)라고 덤덤하게 묘사한다. 그 까닭에 독자는 더 할 수 없이 끔찍함과 비참함을 상상하게 된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p.58)
그는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p.58)에 갇혔으나 인간이라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포로들은 이미 안은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는 비인간들이다. 이들은 생존 투쟁을 위해 인간의 동물적 행동을 입증하는 실험장 안에서 ‘가라앉은 자’ 또는 ‘구조된 자’로 끊임없이 실험 대상이 된다. 인간보다 동물에 더 가까워진 참혹한 현장에서 프리모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 로렌초에게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은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프리모 레비. 그러나 ‘인간성은 이미 땅에 묻혔다’(p.187)는 그곳에서 희미한 가능성조차 쉽게 포기하지 않은 그 역시 위대하지 않은가.
프리모 레비는 인류를 구한 자이다. 나치즘의 자행 속에서도 자신이 목격한 공포를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이 기록은 우리들에게 아우슈비츠를 전쟁의 에피소드쯤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p.302)라는 그의 문장이 아포리즘처럼 읽힌다. 운이 좋게 화학연구소에서 일을 했을 때에도 ‘사나운 개처럼’ 달려드는 기억의 고통을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고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을’(P.216) 쓴 희미한 가능성에 대한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지금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