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헌터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모르는 번호가 휴대폰 화면에 떴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 분명 스팸 전화는 아니다. 순간 이 번호의 주인은 누구일지 몹시 궁금했다. 진동 울림이 끊기기 전 전화를 받으려고 도서관 자료실에서 냅다 뛰어나와 통화 버튼을 밀었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임다희 님이시죠. 저는 OO 서치펌 담당자 OOO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신인, 헤드헌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언제, 어느 사이트에 올려뒀던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나의 오래된 이력서를 열람 후 연락을 취한 것이다. 헤드헌터는 이력서에 재직 중이라고 기재되어 있을 전 직장에 아직 재직 중 인지를 물었다. 나는 약간 시원섭섭함이 묻어난 투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퇴사 시점과 그 이후의 한 일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OOOOOO는 작년 3월에 퇴사를 했고요. 그 후 6개월 동안 부모님 집 짓는 일을 했습니다.
이후 인테리어 디자인 일과는 전혀 다른 업계에서 반년 간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쉬는 중이고요."
내 대답을 들은 헤드헌터는 살짝 주춤했다. 전화상으로도 그녀의 머뭇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아주 짧은 정적의 이유를 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1,2초 정도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의 커리어 공백기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경력과 전문성을 가장 선두 항목에 두고 후보자를 탐색하는 그녀에게는 나의 행적은 다분히 킬링 타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여기는 게 당연한 생리 구조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내 마음 어딘가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헤드헌터는 채용 매칭 전문가답게 친절하고 매너 있게 나의 커리어 상태를 진단해 주었다. 그녀의 친절한 답변을 문학버전으로 각색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당신은 이미 궤도에서 벗어났소. 아무래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가 힘들 것 같소'
그러나 그녀는 예의 있는 사람답게 내게 전화한 목적도 잊지 않고 설명했다. 그녀가 소개한 채용 포지션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대기업에 팀장 자리였다. 회사 내부에 그 자리를 채울 만한 적합한 인재가 없던 걸까? 회사 이름과 직무를 듣자마자 몇 년 전 그 회사로 이직한 동료 S가 떠올랐다. 그가 그 회사로 이직한 후 몇 번의 술자리를 가진 적 말고는 따로 그와 연락을 취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아직도 그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내가 퇴사한 후로 그가 그 회사를 다니건 다른 회사로 이직했건 내 관심사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의 안부, 동종 업계로의 이직, 대기업, 커리어 쌓기 등등.. 작년 3월, 퇴사를 한 이후부터 나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이삿짐 포장 박스에 넣고 테이프로 탄탄하게 봉한 뒤로는 열어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때 열어보겠지라며 일단락한 나의 과거였다. 완전한 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행 중이지도 않는 휴직 중인 과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와서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너의 퇴사, 그리고 이후에 삶은 안녕해?
나의 퇴사 이유는 이직이 아니었다. 명랑하게도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므로 새 출발의 갈망은 다른 직장으로 이직 따위로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었다고 생각했건만 잠잠한 호수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것이다. 수면 위로 드리워지는 동그라미가 점점 커졌다. 점점 넓어지는 파문을 뒤로한 채 나는 그녀에게 쿨하게 답했다.
"제 이력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토해 보시고, 제 이력이 먹힐 만한 자리라면 오픈하셔도 좋고,
아니라면 과감히 버리셔도 되니 편하게 판단하셔도 되겠습니다."
살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팔릴 생각도 없다는 입장을 전하듯 나는 세상에서 가장 쿨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에게 깍듯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움츠려든 어깨를 펴려고 멋쩍게 스트레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