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강박 벗어나기
몇 년 동안 매일 아침 체중계에 오르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인 몸무게는 실망을 안겨준다. 땀 흘려 운동한 보람도 없이, 맛있는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원래 체중으로 되돌아가는 대문자 T같은 체중계의 숫자는 야속하기만 하다.
버리기는 아깝고 남 주기는 애매한 작아진 옷들을 보며 언젠가 다시 입을 수 있을 거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는 것 또한 나를 슬프게 한다. 정리할 결심에도 옷장 앞에서 쌓인 옷들을 들었다 놓았다 망설이는 나의 우유부단함은 답답함을 더한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디지털 세상 또한 나를 지치게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수많은 웹사이트와 복잡한 회원가입 절차는 나를 지치게 만든다. 새로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고 기억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짜증을 유발한다. 잦은 오류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며 나를 인성 파괴와 인격 성숙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게 한다. 관공서나 은행에 직접 가지 않아 편리해졌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직접 가서 기다리는 편이 마음이 더 편했다는 착각마저 든다.
온라인 쇼핑마저 이제는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진다. 무거운 짐을 직접 운반하는 수고로움은 덜었지만, 퇴근 후 온라인 장보기를 깜빡하거나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다 잠드는 일이 잦아졌다.
기대했던 즐거움이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은 식사 자리에서도 이어진다.
이케아 강동 스웨디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은 부족한 인내심을 여실히 드러냈다. 30분 줄 서서 주문하고 30분을 더 기다려 받은 음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빈 접시를 마주한 남편과의 어색한 웃음은 씁쓸함을 남겼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서운함이 밀려오곤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가벼운 흉에 공감 대신 훈계로 답하는 남편은 나를 서운하게 한다. "그 사람은 왜 저렇게 말할까?"라는 나의 물음에 "그러게"라는 짧은 공감 한마디가 그토록 어려웠던 걸까. "그냥 들어"라는 무심한 대답은 그가 진정 '남의 편'인 듯 느껴지게 한다.
나를 가장 깊은 슬픔으로 이끄는 것은, 세월의 흐름 앞에서 무력해져 가는 가족의 모습이다.
늘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당당했던 어머니의 힘없는 목소리는 나를 깊은 슬픔으로 이끈다. 젊은 시절 몸을 아끼지 않고 고생하신 탓에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깊은 아픔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