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엔 그가 직접 은퇴한 오페라 감독 '제리'로 출연한다. 그야 원래 자신이 감독한 영화에 직접 출연하는 것으로 유명하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건 극 중 그의 사돈인 '미켈란젤로'의 기행이다. 그는 집에서 샤워를 할 때마다 그 어떤 바리톤보다 뛰어난 성량으로 오페라를 부르지만, 오직 그때뿐이다.정장을 차려입고 캐스팅 장소에 서면, 천상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보통 사람이 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노래를 이어간다.
하지만 제리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그를 무대에 세운다. 이동식샤워 부스에 넣어서.
미켈란젤로는 벌거벗은 채 큰 타월만 아래에 두르고 무대에 등장한다. 비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마친 그는샤워 부스로 들어가고, 곧 천장의 샤워기에서 물이 나온다. 그리고그는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샤워를 하고, 또 노래를 한다. 황당한 설정에 웃음이 나오지만, '샤워'라는 행위는 과연 그가 무대에서도 멋진 오페라를 부를 수 있게 해 준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곧 그의 노래와 연기에 푹 빠진다.
어이가 없어허탈한 웃음을 지었던 에피소드다. 하지만 얼마 전, 샤워를 하며 '아, 그건 이렇게 바꾸고, 그다음엔 이런 이야기를 넣으면 되겠구나.'라며 요즘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술술 써지질 않고 자꾸 끊겨 답답하던 참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더 해야 하나, 글 사이는 어떻게 연결해야 하나, 막막하던 차에 샤워를 하며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처음은 영화 <기생충>을 본 때였다. 사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글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역시 영화 리뷰는 어려워-(그전에 쓴 영화 리뷰는 단 한 개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런데 영화 장면들이 잔상으로 남았는지, 자꾸 그 순간들이 떠오르고 그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글의 구성까지 다 떠올려버렸다. '첨엔 이런 이야기를 쓰고, 그다음엔 이런이런 소재들을 다루고, 그리고 남자 친구가 물었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면 되겠구나!' 그리고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는,그 생각들이 흩어질까 두려워 머리에 그대로 수건을 두른 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고 온게 4시 40분쯤이었고, 이후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나 저녁을 먹은 게 8시였으니, 3시간 만에 글 하나를 다 써버린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에겐 글을 몇 편이고 더 쓸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보통 한 글을 완성할 때 며칠이 걸리는 게 예사인 나로서는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걸 다 글로 토해내고 나니 기분도 심히 상쾌했다. 물론 방금 샤워를 한 탓도 있었겠지만.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벌거벗고 있어야만 노래가 잘 나왔던 미켈란젤로처럼, 나 역시 샤워를 할 때 온전한 나로서 안정감을 느끼는 걸까?사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샤워는 내 영감의 트리거다.
트리거(trigger) : 사전적인 뜻은 총의 방아쇠, 반응 사건을 유발한 계기, 또는 폭탄의 폭파장치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에선 어떤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마셜 골드스미스는 그의 저서 <트리거>에서 이를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모든 자극이라고 정의한다.
샤워를 하고있을 땐 딱히 집중을 할 필요가 없다. 몇십 년 동안 매일 한번 이상은 하는 일이니, 적어도 만 번은 반복한 일이니까.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어느 쪽 손을 먼저 짚고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으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쎄, 나는 오른손 잡이니까 오른손을 먼저 짚었으려나? 아, 근데 요즘 왼쪽으로 누워자니까 왼손을 먼저 짚었을 수도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반복될 뿐이다. 샤워도 그렇다. 습관처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움직이는, 그런 행동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럴 때면 머리는 몸에게 지시를 내려줄 필요가 없어,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고, 그 생각을 또 다른 생각으로 계속 이어가며, 그 끝에 평소에는 나오기 힘들었을 근사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게 아닐까. (고백하건대 이 글 또한 샤워를 하며 떠올린 글감 중 하나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는 한 손에 수저를 든 채 책상에 앉아 선잠을 잔다고 한다. 그는 잠에 들어 손에서 힘이 풀릴 때 수저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고, 그 소리에 잠에서 깨 벌떡 일어날 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우리가 자면서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듯, 갓 잠이 들었을 때 불가능한 게 없는 그 무의식의 세계를 훔쳐보려 한 건 아닐까.
찾아보니 싱어송 라이터 김윤아도 샤워를 할 때 곡에 대한 영감이 많이 떠올라, 그때 곡을 가장 많이 쓴다고 한다. 내 가설이 맞는 걸까,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