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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 Aug 06. 2019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책 <데미안>을 읽고


  '나'에겐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선의 영역으로 부모님과 들이 있는 하얗고 따뜻한 세계고,  하나는 의 영역으로 하녀들의 입을 통해 고약한 이야기들이 떠도는 세계다. '나'는 선한 영역에 안도감을 느한편 악의 영역에 어두운 쾌감을 느며 두 세계를 오간다.


이것은 아버지의 거룩함에 드러난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받치던, 그리고 누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기 전에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기둥들에 나타난 최초의 금이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나'는 서서히 악에 잠식된다. 이제 어머니내리는 비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우산이 되지 못한다. 이미 검은 비를 흠뻑 맞은 내게 어머니의 포옹은 너무 따갑다.



데미안 


   데미안은 하릴없이 어둠의 세계로 휩쓸려가는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나'는 떻게 그가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 크로머를 단숨에 제압하고, 규정된 룰을 거스르며 옆자리로  수 있었는지 궁금해한다.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마법과도 같은 여섯 번째 감각을 발전시킨 거야! (중략) 네 내면으로부터 막을 수 없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시도하면, 그건 이루어진다.

... 뭐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동화적 답변에 김이 빠졌다. 러나 '나'는 데미안과 어울리며, 그가 한 얘기들을 곱씹는다.


밥 먹기 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나'의 가족들이 믿는 카인과 아벨은, 데미안의 그것과는 다르다. 죽임을 당한 아벨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카인이 옳다는 데미안의 말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데미안은 '나'를 자신과 같은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라 부른다. '나' 데미안이 자신을 선택하 한 그  떼려 하지 않는다.


데미안은  '나'선한 영역만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아닌, '나'가 익히 경험한 두 개의 세계를 모두 다스리는 아프락사스라는 신의 존재를 알.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이제 가족들이 속한 선한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데미안과 같이 선이자 악이며, 악이자 선인 경계에 서야 한다.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다른 학교에 가며 데미안과 헤어지게 된 '나'는 혼자가 되어 어쩔 줄 몰라한다. 다만 그가 남긴 문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방황다, 우연히(아니, 어쩌면 이것도 신의 뜻 이리라) 아프락사스를 아는 이를 만난다. 선과 악을 모두 아우르는  음악을 연주 피스토리우스였다. 피스토리우스는 '나' 아프락사스라는 공동체로서의 종교와 불꽃 숭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일렁이는 불꽃에  매료되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다. 그러다 동물인 듯 글자인 듯 제 모양을 바꾸는 불꽃에 마음을 , 저 깊은 에 있는 악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정말, 뭐랄까, 지독히 고리타분해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나'회하며, 바로 데미안을 찾는다. '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길 안내자가 나를 떠났어. 나는 완전히 어둠 속에 서 있어. 혼자서는 단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어.

도와줘!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낯선 땅에 도착한 '나'의 앞엔 데미안 있다. 데미안은 바로 어제 본 듯 '나'를 자연스레 맞으며 집으로 초대고, '나'는 그곳에서 에바 부인을 만난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에바 부인은 '나'에게 단순한 친구의 엄마가 아니다. 모든 여인이자, 사랑이, 어린 시절 드러운 미소로 모든 걸 잊게 해 줬던 머니.


사람 마음을 꿰뚫는 데미안을 낳고 키운 분이지 않은가! '나'는 데미안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더 큰 힘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모두 받아들인다.



'' 그리고 나


  이리도 나약하다니! 제 인생이야 스스로 찾는 것이지, 안내자가 왜 필요한가? 누군가가 곁에 있지 않으면 금세 불안해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하는 '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 자신을 포용해주는 엄마에게,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던 데미안에게, 사이비 목사인 피스토리우스에게, 그리고 데미안의 엄마인 에바 부인에게 매달리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년에 다름 아니다.


만약 그때 '나'가 베아트리체라는 여자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데미안에게서  수 없는 고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새로운 또래 친구들을 사귀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크로머에게서 제 힘으로 벗어났다면 어땠을까. 순간은 괴더라도, 때로는 길을 잃더라도, 결국은 궤도를 찾아 삶을 살지 않았을까.


우리가 어떤 인간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나'의 모습은 바로 나였다. 어렸을 땐 자연스레 내 전부였던 부모님의 모습을 닮으려 했고, 학교에 다니면서는 기가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 그게 내 모습인 듯 굴었다. 여전히 진짜 나를 알아가는 데엔 게으르고, 그저 둘러싸인 환경에 치중하며 그게 나인 듯 살고 있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택의 순간 후엔 매번 크고 작은 후회들이 남았고, 그마저도 스스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큰 일들이 닥치면 혼자선 버거워 변에 의견을 묻는다.




아,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데미안은 '나'에게 깨우침을 줬지만, 동시에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이전의 '나'는 데미안이라는 외부의 존재로부터 자신을 찾으려 고군분투지만, 결국 긴 여정의 끝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 안의 '나'를 발견한다. 


알 속은 안락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선, '나'가 데미안이란 굴레를 벗었듯, 보이지 않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제한된 세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용기를 내 온전히 내게서 나온 소리를 따라가야 한다. 그부딪히고, 또 부딪혀, 껍질을 깨고 부야만 비로소 너머세상을 볼 수 있다. 


선도, 악도 아닌 나의 세상을.





*. 표지 사진 : https://unsplash.com/@enricosottocor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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