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기억력
그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 회사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집에선 좀 심하다. 내가 했던 말을 잘 까먹고 아팠던 것도 곧잘 잊어버려 "그때 내가 얘기했잖아! 나 아팠던 것도 기억 못 해?"라고 짜증을 내곤 한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같이 유튜브를 보는데 본가가 있는 광주를 여행하는 영상이 나왔다. 감각적으로 변신한 기차역 앞 전통 시장부터 공룡알빵이 맛있는 전국 탑파이브의 빵집을 지나 다음에 같이 가보자고 했던 펭귄을 테마로 한 오래된 마을이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오, 저기 내가 얘기한 데다!" 했더니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그날 유난히 회사에서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많아서였는지 어찌 보면 그는 평소와 같은 것뿐이었는데 급 화가 났다. 농담처럼 볼멘소리를 하다 결국 "나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나도 애기한테 그 얘길 했다는 거 자체를 잊어버리면 좋겠어!"라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으레 미안해할 줄 알았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잊어버려 애기야." '같이 잊어버리자니 그게 뭐야~'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난 애기가 여러 번 얘기해줘도 괜찮아."
순간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지난 집들이 때가 생각났다. 내 친구들이 집들이에 와 내가 이미 그에게 해준 얘기를 다시 했을 때도 그는 처음 듣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며 연신 맞장구를 쳤더랬다.
*. 표지 사진 : Photo by Fredy Jacob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