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l Sep 30. 2020

워터 프루픈데  초코 프루프는 아닌가 봐

내 남자 유머집


그는 비엔나소시지를 좋아한다. 돈가스를 좋아하고 삼겹살을 좋아한다. 오늘은 뭐 먹을까~? 물으면 고기!라고 답하는 날이 많다. 주말 아침엔 배가 고프다며 과자 봉지부터 뜯고, 내가 아묻따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사이 메뉴판을 꼼꼼히 살핀 후 딸기 스무디를 주문한다. 깍두기는 절대 안 먹고, 배추김치는 "이거봐라~ 나 김치 먹는다~"라며 생색내기용으로 가끔 집어먹는다. 한 마디로 초딩 입맛인 그는 


바로 내 남편이다.


식성만이 아니다. 유머감각도 초딩스럽... 아니 그보다 더하다. 베이비스럽다.



기인열전


지금은 나만 하고 있지만 몇 주간 남편도 같이 재택근무를 하던 때가 있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열심이었고 야근도 꽤 잦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나갈 일이 생기자 상황이 달라졌다. 왕복 세 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을 생각하니 마치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저녁처럼 절로 한숨이 나오는 듯했다. 내가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남편 혼자 회사에 보내는 게 괜스레 미안하게 느껴졌다. 보통은 보드게임이나 맞고를 하며 내기로 거는 배 방귀를 조건 없이 허락하기로 했다.


불행 중 다행인 듯 얼굴이 밝아진 그는 이내 내 배에 얼굴을 대고 푸르르르르-하는 소리로 배 방귀를 뀌더니 기쁨과 의아함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와, 나 지금 코로 한 건데, 콧구멍으로 낀 거야! 와, 신기하다. 난 그냥 숨만 쉬었는데!" 원래는 입으로 해야 하는 걸 콧구멍으로 해냈다며 또 해보려 코를 다시 내 배에 들이밀었다. "아, 왜 이제 안되지? 이거 되면 진짜 나 기인열전 나가는 건데..." 스스로 배 방귀를 뀔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자신의 콧구멍 크기에 감탄하던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콧구멍 크다고 놀리면 맨날 평균이라고 하면서.



일등은 빨간색


우리 집엔 고양이 정수기가 세 대 있다. 하나는 에메랄드빛의 선인장 모양, 하나는 고래가 떠다니는 둥근 바다 모양, 마지막 하나는 가습기처럼 하얗고 네모난 모양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그 네모난 정수기인데, 후에 생긴 다른 정수기들 때문인지 저녁에만 들어오는 침실에 있어선지 근래에 아이들이 가장 안 쓰는 정수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나도 신경을 못써 어느새 하얀 표면 위로 빨간 물 때가 끼기 시작했다.


물때는 왜 빨간색일까? 유리잔을 씻은 후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남은 물자국이 허여멀건하게 남던데, 왜 그 물때는 하얀색이나 회색이 아니고 빨간색일까? 궁금해하자 남편이 짐짓 아는 체 말했다. "왜긴~ 빨주노초파남보!" 이때까지도 뭔 말인가 했다. "빨간색이 일 등이자나~" 띠옹~ 초등학생이야 뭐야, 아니 초등학생도 그렇겐 얘기 안 하겠다. (빨간 물때는 공기 중에 부유하던 미생물이 물기가 있는 곳에 붙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청소를 잘 하자.)



언어의 연금술사


다시, 둘 다 재택근무를 하던 때의 이야기다. 어째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출퇴근을 할 때보다 배달을 시키는 일이 잦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스터리하다. 그날도 점심은 토스트를 시켜먹고, 저녁은 뭘 먹을까 하다 올여름에 한 번도 안 먹은 게 생각나 냉면을 시켰다. 만두는 집에 있는걸 바닥만 구워 겉바속촉으로 곁들일 예정이었다. 그런데 퇴근을 하려는 찰나 급 회의가 잡혔고 도중 냉면이 도착했다.


정신없이 회의를 끝내고 한참을 먹다 깨달았다. 아 맞다, 만두. 어떡하지?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가 쿨하게 말했다. "난 만두 안 좋아해~" 귀차니즘을 가장하기 위한 뻔한 거짓말인걸 알았지만 모른 채 냉면을 마저 먹는데 마침 티브이에 만두와 국수 먹방이 나왔다. 에이, 안 되겠다. 결국 먹다 말고 직접 만두를 찌러 가는데 남편이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만두 다되면 같이 먹어야지~" 뭐? "만두 안 좋아한다며!" 그러자 예의 능글거리는 미소를 띠며 그가 답했다. "만두는 안 좋아하는데, 애기가 해준걸 좋아하는 거지~" 뭐야, 언어의 마술사야 뭐야, 바람둥이야 뭐야~




이 뿐만이 아니다. 요즘 즐겨먹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흘렸는지 소파에 까만 초콜릿이 묻은 걸 발견했다. 오래됐는지 얼른 물티슈를 들고 와 닦는데도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다. "워터프루프(water-proof)라 산 건데 효과가 없구만!" 그러자 그가 말했다. "워터프루픈데 초코프루프는 아닌가 봐."


단순한 말장난은 생활이다. 보통 30점이나 50점을 걸고 맞고를 하는데, 내기가 걸려있기에 정확히 하기 위해 핸드폰이나 태블릿 메모장에 점수를 적는다. 그 날은 내가 9점을 내며 첫승을 거뒀고(고는 없었다) 0대 9를 적으며 그가 말했다. "어? 영구다 영구!"


유치하지만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 표지 사진 : Photo by Charles Deluvio on Unsplash

이전 29화 사랑해 그리고 기억 못 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