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끓이다

귀찮음에 숨은 가시

by 정다훈

사나운 바람이 불어오는, 쌀쌀하다 못해 살벌하게 느껴지는 추위가 찾아왔다. 이불 안에 숨어서 계절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무언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건조해진 날씨에 시위라도 하듯 코피가 흐르고 있다. 인터넷에서 본 짤막한 토막상식 몇 가지가 떠올라 세게 풀지도 않고 고개를 젖히지도 않으며 열심히 피를 닦았다. 일어나자마자 피를 봐서인지 머리가 조금 아파온다. 고질적인 편두통은 거진 매일 겪는데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괜히 관자놀이만 꾹 꾹 누르면서 나아지길 바랄 뿐.


머리가 아파서인지 피를 흘려서인지 입맛이 영 없다. 평소보다 절반정도의 양을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 이상으로 먹는다면 속까지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따뜻한 물이나 한 잔 마셔야겠단 생각에 물을 올렸다. 타타타탁, 가스레인지가 불을 보여주는 소리.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멍하니 보고 있었다. 라면을 끓을 때는 한참을 봐야 했는데 조금만 있어서 그런지 금방 열이 올라 보글보글 하는 소리가 난다. 이 이상으로 불의 힘을 빌린다면 내가 넘기지 못할 것 같아 급히 불을 끄고 잠시 식혔다. 물에 불이 붙은 것인지 냄비 위로 연기가 올라온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고통스러워하던 때는 지났다. 이젠 짜증도 나지 않고 그저 귀찮게 느껴진다.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오래, 자주 있어야 하는 상황이 귀찮고- 머리가 아파서 무엇을 하던 지끈 거리는 느낌이 귀찮다. 가끔 코피가 나서 휴지로 코를 막고 피를 멎게 하는 행동이 귀찮다. 귀찮고 귀찮으며 귀찮다. 끝없이 무뎌지는 중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둥그런 구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곳저곳 부딪히면서 튀어나오고 들어가며 다각형이 되고 이내 들어간 부분을 다시 빼내기 위해 자신을 위로하고 성장시키며 튀어나온 부분에 타인을 찌르지 않기 위해 예절과 사회생활을 배운다. 하지만 다시 구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꼭 박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튀어나온 부분 중에 무기로 생각될 만한 곳을 사회에 찌른다. 그렇게 풍파를 견디는 것이다. 찌른 곳이 너무 아파서 떨어질 때도 있고, 알고 보니 무기가 아니라 작은 가시여서 견디지 못해 떨어질 때도 있다. 자신의 무기라고 상상도 못 한 부분이 갑자기 다른 곳에 꽂혀 견뎌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나의 무기를 모른다. 지금은 튀어나온 부분을 모두 다듬어서 가시로 만들어 밤송이가 되어버릴 지경이다. 이런 나를 무디게 만드는 것은 가시를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하는 귀찮음이다. 이 귀찮음은 두꺼운 장갑이 밤송이를 줍게 해 주듯이 나를 감싸 안아 가시를 못 내비치게 한다. 헌데 우습게도 이 장갑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어 빠져나가기 싫게 만든다. 이를 위한 핑계와 정당성을 만들어 나를 붙잡는 이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시작부터 휴식을 시켜주는 이에게 감사를 표하다니, 마라토너가 시작선을 조금 지나 만난 물을 나눠주는 이에게 감사를 표하며 뛰지 않고 담소를 나누는 모양새랑 똑같다.


정신을 차려 끓인 물을 다시 컵에 부어 천천히 마셨다. 차갑던 배가 갑작스레 만난 온기에 당황했는지 이런저런 소리를 낸다. 한결 나아진 몸 상태에 다시 정신을 차려야지 하며 책상 앞에 앉는다. 오늘은 컴퓨터를 켜지 않으려 한다. 옆에 있던 패드로 노래를 틀어두고 공책을 꺼내 샤프를 집는다. 쉴 때는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옆에는 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한 권 놔둔다. 모든 세팅이 끝나고 나면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 생각에 잠긴다.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천천히 눈을 뜨니 앞에 있는 불이 없어 어두운 모니터에 내 얼굴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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