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소중한 비밀 공간이 있다. 지도 앱에 집 주변의 카페를 검색했더니 본 적 없는 곳이 바로 앞에 있었다. 대체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길래 눈에 띄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에 곧장 찾아갔던 그곳. 건물 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계단이 존재한다. 그곳을 따라 올라가면 문은 없고 그대로 복도가 나타나고 멀지 않은 끝에 빛이 새어 나온다. 홀린 듯 들어간 카페는 아늑한 나무집 안에 들어온 듯했다. 도심의 건물들 사이에 존재할 수 없을 것 만 같은 자연 속의 카페에 들어선 기분. 들어서자마자 우드풍의 인테리어와 곳곳에 존재하는 덩굴, 꽃들이 내가 카페에 온 것인지 식물원에 온 것인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정신없이 눈을 굴리던 내게 조심스럽고 조용하지만 은은히 귀에 똑똑히 들어오는 목소리가 들린다.
주문하시겠어요?
분명 아무도 보이지 않던 나무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얼굴. 마치 나무속에 집을 지어 숨어있던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뽀얀 얼굴만 내어 놓은 듯했다. 커피라고는 한 모금만 마셔도 머리가 아팠던 기억 탓에 마셔본 적 없이 어디서든 달달한 음료를 찾던 내가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묻고 있었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에는 조용하기보다는 종을 울렸을 때 딴딴하지만 청아한 소리가 나는 잘 만들어진 느낌이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그니처 메뉴로 자랑하던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 의자, 테이블, 모든 것이 나무로 이루어지고 인테리어마저도 숲 속에 있다는 상상이 들게 하는 곳. 내가 정말 현실세계에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문을 넘어서 다른 곳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문을 나섰다 들어왔다. 마침 타이밍 좋게 나온 커피를 받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아까의 뽀얀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신기하죠?
괜히 민망함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급히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머리가 아플까 싶어 마시지 않고 있었던 커피였는데 갑자기 들이킨 탓에 놀랐던 것일까. 아 이제 머리가 아프겠구나-싶어 손바닥을 핀 체 머리에 올려두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뭔가 싶어 다시 한 모금 들이켰을 때는 옆에서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는 듯한 목소리로 맛이 괜찮냐는 질문이 들렸다. 신기함에 커피가 맛있다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젊어 보이지만 분명히 사장으로 보이는 이 아가씨는 두 손을 합장하며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커피를 배운 이후로 계속해서 시도하던 레시피라며 맛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이번에는 손으로 가려서일까, 목소리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왠지 분명 이 사람의 목소리에서는 무언가 울림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거의 매일매일 카페를 찾아가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은 얘기를 나누고 많은 얘기를 나눴겠거니 싶었지만 정작 기억에 남은 것은 커피 맛과 그 청아한 목소리 밖에 없다. 서로 무슨 얘기를 주고받은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이없는 곳에 존재하는 계단에 걸음이 무거웠던 처음과 다르게 점점 계단을 빠르게 가볍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바빴던 하루에 시간이 나지 않아 카페를 못 가게 되어 집에 들어선 날 그 계단을 오르지 못한 것에 실망감이 찾아왔다. 나는 이것이 카페에 대한 그리움인지 그 여자에 대한 연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카페로 곧장 뛰어가 쉴 틈 없이 올라선 계단과 복도의 끝에 들어선 빛에는 어떻게 운영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나밖에 없던 카페에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들어갔을 때 나를 반겨주던 목소리가 이 목소리면 안되는데-하는 생각에 인사를 받지 않고 주변만 둘러보았다. 남자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지 나에게 주문을 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시그니처 메뉴를 말하고 괜히 카운터를 기웃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커피가 나오기까지 1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었던 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분명 나의 속을 씻어 내리는 듯한 그 깔끔한 목소리가 갑자기 듣기 이상했던 것은 곁에 있던 남자를 보는 눈빛때문이었을 것이다. 괜히 예민한 것이다 싶어 별다를 것 없이 커피를 먹고 대화를 조금 나누다 평소보다 일찍 카페를 나섰다. 다른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려오는 계단은 아까와 다른 높이로 보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섬뜩한 기분과 움직이지 못할 무거운 분위기.
집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그 목소리를 반나절도 안 돼서 완전히 잃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 맞는 것이라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또다시 자연스레 발걸음이 향했지만 차마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 없이 자연스레 옮겨진 다리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읍참마수가 이런 기분이었기에 나왔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장군이 되진 못할 팔자인지 다리에 몸을 맡겼다. 올라선 그곳에는 평소와 다르게 많은 손님이 있었다. 바쁜 탓인지 청아했던 목소리는 갈라져 여느 카페의 인사와 똑같이 느껴졌다. 거기에 내가 처음 왔을 때 열심히 둘러보던 빌딩 사이의 숲에 온 듯한 감동도 느낌도 하나도 없고 오히려 오래되고 구식적인 인테리어로 이루어진 듯한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커피를 만드는 그녀 대신에 어제의 그 남자가 커피를 가져다주었고 많은 손님 탓에 대화할 기회를 엿볼 수도 없었다. 커피를 곧장 다 마신 후에 바로 카페를 나서며 다음에 얘기하러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나올 때 보였던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작은 새의 뽀얀 모습이 아니었다. 겨우 시 한 손으로 인사하며 건네던 한 마디.
다음에 봐요.
이 한마디가 나를 계단을 오르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잠깐의 꿈을 꾸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곳에 잠시 다녀왔다. 내가 다녀왔던 그 계단 위의 복도 끝은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