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다훈 Nov 14. 2024

낭비

사랑했더니 멍청해졌고 그래서 행복했다

 길에 버려진 페트병 속의 물이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던 때였다. 아름다움과 쓸모의 개념이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효율적인 시간, 절약하는 소비 따위는 모두 잊은 지 오래였다. 아니, 잊지는 않았고 아마 특정적으로 낭비라고 생각 들지 않게 하는 장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갑갑한 시간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1분 단위로 쪼개진 시계에 맞춰서 매 순간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빡빡한 재정 속에 묻혀 지내야 했다. 100원 단위로 쪼개진 가계부에서는 나에게 사치는 둘째치고 한 푼의 낭비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라는 목표가 크지도 않고 많은 돈을 모으겠다는 바램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매일같이 빠듯하게 살아도 부족한 것이 시간이었고 돈이었다. 단순히 잠을 자고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출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했고 그런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돈은 부족했다.


 이런 삶에서 조금이라도 여유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아껴내야 했다. 조금씩 아껴서 모은 시간으로 자기 계발을 하고 수단을 늘려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수단으로 돈벌이를 늘려서 돈을 늘려야 했다. 그래야만 나에게 더 이상 작은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삶이 찾아올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고작해야 몇 분, 몇 천 원 언저리의 시간과 돈이 조금씩 모였고 그 정도는 잠깐의 영상시청이나 귀찮음에 택한 배달음식에 금세 사라지곤 했다.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해놓고선 나중에 가서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후회한다.


 와중에 직장 상사에게 소개팅을 강요받았다. 예상에 없던 사치다. 소개팅을 위해서 버려지는 돈과 시간이 얼마일지 벌써부터 계산이 되기 시작한다. 사실 상대가 누구던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긴 얘기 없이 별다른 애프터 없이 단순한 일회성 만남으로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의 나에게 연애는 지독한 사치니까.


 퇴근 후의 시간, 온전히 나의 시간이어야 할 것인 이때에 나는 또 다른 사회생활을 하러 가는 중이다. 불편한 옷을 입고 나선 불편한 자리에 아직 상대를 만나기 전인데도 부정적인 감정만 몰려온다. 그분께는 실례일지라도 서로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했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던 내 앞자리에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앉던 너,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자연스레 지어지는 눈웃음과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나긋한 목소리지만 예의 있고 똑똑히 말하는 인사, 자리에 얌전히 앉아 미소를 유지하며 티 없는 맑은 눈으로 나와 눈을 맞춰주던 모습.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때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입고 있는 옷과 처음 보는 사람과 하는 자리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즐거움이 생겼다. 처음 했던 다짐과 달리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말을 내가 건넸다. 너보다 많은 질문을 건네고 말을 했으며 혹여나 맞는 취미가 있는지 약속을 잡을만한 껀덕지는 없을지 기대하며 혹여나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문제가 되진 않을지 고민하면서 불편한 자리를 이어갔다.


 다행히도 다음 약속을 잡아내고 헤어진 뒤에 집으로 돌아와 나는 쓰러졌다. 다음 날의 출근을 위한 준비, 시간의 절약, 오늘 쓴 돈의 가계부 기입, 집안과 자기 관리 따위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쓰러진 체로 폰을 붙잡고 잘 들어갔다는 너의 연락만 기다렸다. 이윽고 보내준 연락에 그날 하루의 피로와 사치는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골칫덩어리를 안겨줬던 상사는 오늘 다시 보니 은총을 내려준 천사 같았다. 소개팅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는 질척거림이 전에는 귀찮고 불편하기만 했을 터인데 혹시나 그녀에게 내 얘기를 조금이라도 들었을까 하는 기대로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비록 네가 아니라 타인과 나눈 얘기였지만 그 주제에 네가 끼여있으니 말하면 말할수록 더더욱 보고 싶어 졌다.


 기다리다 미쳐버릴 듯했던 주말이 왔다. 휴식과 돈벌이를 위한 수단을 만들고 실천하던 나만의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너에게 맞춰진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내 시간과 돈을 쓰기 위해서 너에게 가고 있다. 여느 커플의 데이트처럼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토요일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거의 내 일주일 생활비에 맞먹는 돈을 썼고 하루를 날렸다. 이상하게도 그러는 동안 돈이나 시간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사치나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완벽했던 하루였을 뿐, 잃어버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썩 만족스러운 하루 같아 보여서 모든 것이 좋았다. 그 마무리에 바보처럼 사귀자는 말보다 결혼을 먼저 말했던 내 멍청한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헌데 너는 이런 내 모습도 좋아해 줬다. 그때 봤던 어색한 미소보다 훨씬 밝은 웃음으로 행복해하며 연애부터 시작해 보자는 말을 했다.


 그날부터였다. 나의 멍청함이 시작됐다. 시간을 쓰는 것에 있어서 고민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을 쪼개서 연락했고 일을 마치고 나서 잠깐 집에 데려다주는 30분이 좋아서 너를 데리러 가곤 했다. 돈을 쓰는 것에 있어서도 고민하지 않았다. 예쁜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꽃을 사서 선물하고 네가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면 꼭 보여주고 시켜주고 먹여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내 인생 최고의 소비였다. 그 모든 시간과 돈에 낭비라는 이름이 붙을지라도 나에게 있어서 정말 필요했던 소비였다.


 너는 그런 장치였다. 갑갑한 나의 시계가 편안히 흘러가게 만들고 빡빡한 나의 소비가 여유롭게 흐르게 만드는 그런 장치. 너 때문에 지난 시간 쌓아온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지켜온 것들이 다 의미가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만들어낸 규칙과 습관 따위는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내 모습은 멍청함 그 자체였다.


 이 멍청함이 나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행복을 위해서 불행을 자초해 오던 나에게 전혀 다른 곳에서 맞이한 새로운 빛이었다. 신기했다.

 

목요일 연재
이전 01화 글쓰기 운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