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의 어떤 물품
오늘은 9291번째 세상이다. 나는 매일매일 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 다른 세상에 떨어지는 사람이다. 오늘의 세상은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만, 출퇴근 길에 마주치는 사람, 변화되어 있는 거리, 국제 정서의 변화와 경제 상태의 변동.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들의 정체는 그저 다른 세상이니까 다를 뿐이다. 나는 오늘도 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새로운 세상에 태어났다.
나의 존재는 좁다. 얼굴만 본 적 있는 사람이 만 명이라면 얘기를 터 본 것은 2천여 명, 알고 지내는 사람은 200명,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20명 정도 일 것이다. 나의 공간은 회사의 내 자리, 내가 살고 있는 방, 본가에서 아들로서 얻는 자리 정도. 여기서 마지막 공간 이외에는 그 어느 공간도 온전하다 할 수 없다. 당장 내일 도착한 새로운 세상에서 내가 퇴사를 했다면 첫 번째 공간은 사라진다. 이사를 하거나 집을 정리해야 한다면 두 번째 공간도 사라진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나의 숨이 붙어있다면 계속해서 유지되는 공간이 하나 더 있다. 내 명의로 만들어진 계정이 만들어주는 사이버공간.
메타버스는 이 공간에 의미를 넣고 만질 순 없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실물 같은 곳으로 만들어준다. 이 속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 따위는 필요 없다. 오직 이 세상에서 나만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헌데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미 세상은 나 이외에는 전부 NPC로 치부하는 일명 ‘NPC병’이 만연하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 중요하고 크지만 남이 봤을 때에는 아무런 의미 없는, 공간을 채우는 인테리어 정도에 불과하다. 개중에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에 따라서 냉장고인지 혹은 그냥 내버려 둔 장난감 소품하나 인지가 갈릴뿐.
오늘의 세상에서 나는 회사의 부품이자 내 방의 빛이며 본가의 냉장고였다. 오늘 만나 저녁을 함께한 친구에게는 가스레인지나 전자레인지 정도였을까. 내가 잠에 든 사이에 도착하는 새로운 세상이 두려워서 일부로 0시 0분이 될 때까지 눈을 감지 않는다. 그전에 눈을 감는다면 정말로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져 버리는 기분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어디에도 한 몸 뉘일 공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먼지가 되어버린.
눈을 뜨고 있다 보니 0시 0분이 되었다. 이제는 내일, 아니 오늘의 내가 새로운 세상을 살기 위해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눈을 감고 다른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시간을 가진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떴을 때 모든 과정이 끝났다며 밝은 빛을 내는 세상이 나를 반기고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 세상에서 나는 또다시 어떤 소품이 될 수 있을까. 지나가는 다른 먼지들에게 당신들은 어떤 공간의 어떤 물품인지 물어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