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보드

by 정다훈

어린 시절, 교실의 한 벽을 짙은 초록색으로 가득 매운 칠판이 있었다. 항시 선생님들의 하얀색 분필가루로 물들어 말랑한 지우개로 지우고 나서 팡팡 두드려 하얀 뭉게구름을 만들며 장난치던 어린 시절의 칠판. 그곳에는 사실 하얀색 보드도 있다. 칠판의 양옆에 있는 학급의 알림과 우리가 매일 주시하던 급식표 등이 붙어있는 알림판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여러 종류의 판을 드르륵하고 꺼내보면 바둑판 같이 생긴 표가 있어 종종 오목을 하던 판과 보드마카를 쓰는 화이트보드, 이렇게 두 가지 종류가 나온다. 그중에 유난히 분필가루에 예민해서 우리가 종종 일부러 지우개를 털어서 나오는 흰 뭉게구름으로 장난을 친 반장의 얘기를 하고 싶다. 초등학생시절 반장의 역할은 이제와 보면 단순히 선생님의 전용 심부름꾼을 뽑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때에는 사회자이자 선생님의 대리인, 즉 선생님을 제외하면 그 반의 절대자였다. 아 물론 힘 앞에서 무능한? 그리고 이런 절대자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은 다름 아닌 이름적기 였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면 꼭 칠판 앞으로 나가서 소란을 피운 학우들의 이름을 적어 돌아온 선생님에게 처벌을 내리도록 하는 그런 시스템의 권한자. 그때는 그 이름 적기가 뭐라고 괜스레 두려워서 반장에게 사정사정하며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이 있다. 사실 본인들도 놀고 싶었으나 그 권력이 달콤해서 일부러 협박을 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 반의 반장은 여자아이 였는데 평범히 학교생활을 하고 무난한 교우관계를 가진 그런 아이였지만 여자아이들의 몰표로 인해 뽑힌 그런 반장이어서 남자아이들은 괜히 싫어했다. 그래서 유독 남자아이들이 장난을 많이 쳤던 것 같다. 그러다 한 친구가 반장의 얼굴에 분필 지우개를 던져 코피를 터트려 부모님까지 오셔서 사과를 한 큰일이 생기고 나서 남자아이들이 더 이상은 반장을 건드리지 못하게 됐다. 그 이후부터 반장은 유독 분필가루를 싫어하게 됐고 선생님이 특별히 화이트보드를 꺼내서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때부터 반장의 필통에는 꼭 검은색 마카가 한 개씩 들어 있어서 종종 친구들끼리 괜히 꺼내서 화이트보드에 낙서를 했고 또다시 혼났던 기억이 있다. 이상하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니까.


모두들 학창 시절에 주번이라는 시스템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 주번이지 주마다 반을 위해 칠판을 지우거나 아침에 간단한 청소를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우유급식을 나르고 하는 그런 잡무를 해주는 봉사자 역할이다. 아침에 일찍 등교를 해야 하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지 못하고 잡무를 해야 해서 다들 주번을 하기 싫어했다. 또 괜히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누구한테 시키려면 반장이나 주번에게 시키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더욱 기피했다. 그 순서가 돌고 돌아 내 차례가 됐고 나와 함께 봉사자가 될 친구는 반장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남자 여자가 같이 놀면 지독스럽게 놀렸기에 단순히 주번을 같이 하는 것만으로 많은 놀림을 받았다. 나도 나인데 여자인 반장은 더욱 상처를 받았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단순히 내가 놀림받는 것이 짜증 나서 놀리는 아이들이 아닌 같이 주번을 하는 것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장은 분필가루를 싫어하는 것을 넘어 두려워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고 지우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나는 지우개를 두 개 다 낚아채 혼자 칠판 지우고 지우개 가루를 털면서 아침에 청소를 더 많이 하라고 했다. 그런 나한테 그 아이는 ‘고마워’라는 한 마디를 건넸고 이때는 왜 그렇게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반장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돌아서 '청소 덜 하는 게 더 좋지 바보야'라고 소리치고 도망쳤다. 기분이 이상하다. 평소와 똑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 않다. 이상하게 눈에 밟히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의 주변을 지날 때면 괜스레 쭈뼛거리며 어색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주번활동을 위해 일찍 나와보니 먼저 나와서 청소를 하고 있는 반장이 보였다. '안녕?' 나한테 웃으며 청소하던 손을 멈추고 인사하던 너를 본 순간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뭔가 짜증이 난 듯한 기분이 들어 대꾸도 없이 빗자루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뭘까, 이 기분은.


그날,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같이 주번을 하던 여자애와 사귀게 됐다고 비밀이니 꼭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라. 어차피 이 나이대의 비밀이야 금방 주변에 하나, 둘 말하다 밝혀지는 것이 대다수였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 사귀는 것은 이미 학교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됐다. 어차피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놀렸지만 이상하게 부러운 사실이 됐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다음날, 어느새 금요일이 되어 다음 주부터는 다른 애들이 주번을 하게 된다. 오늘이 일찍 나와야 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기쁜 마음에 학교에 와서 교실 문을 열었더니 반장은 없었다. 괜히 심술이 나서 가방을 책상에 세게 내려놓고 청소를 나보다 많이 하기로 해놓고 약속을 안 지킨다며 툴툴거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복도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문이 열리고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헉헉 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나한테 또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어제 있었던 친구의 비밀소식(아니 이제는 모두가 아는) 때문인지 의식이 됐다. 부끄러워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청소를 하다 반장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이 주번 마지막이지? 일주일 동안 칠판 대신 해줘서 고마웠어."

"고마우면 닭꼬치나 하나 사줘."

라며 퉁명스레 뱉었지만 또다시 들은 고마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그래서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어느새 눈에 자주 보이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흔쾌히 사주겠다는 말에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어 다른 것을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 했다. 그리고 천천히라는 것을 모르던 그 시절의 나는 친구가 주번을 같이 하던 여자애와 사귄다는 것을 아냐고 물었고 다른 약속을 건넸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귀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보이는 반장의 얼굴에 나는 망했다는 예감이 들어 도망쳤다. 화장실로 도망쳐 반장이 친구들에게 말해서 소문내진 않을까, 친구들이 이걸 알고 나를 놀려대지 않을까 걱정하며 소리치다 수업시간이 다되어서야 반으로 돌아왔다. 그날 하루종일 반장을 피해 다녔다. 그리고 주변의 눈치를 보니 다행히 이 사실에 대해 아는 친구는 보이지 않았고 반장이 그래도 의리를 지켰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어 가방을 메고 도망치려는 나를 반장은 붙잡아 세웠다.

"꼬치는 먹고 가야지."

라는 말에 또다시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됐으니 집에 갈 거라고 했다. 반장은 그런 나를 보고 갑자기 웃음을 짓더니 먼저 교실을 나와 앞서 걸으며 말했다.

"그 정도 부탁이면 내 꼬치는 네가 사줘야지."


그리고 그날 먹은 문방구의 닭꼬치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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