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
클리셰, 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전형적인 수법이나 표현을 뜻하는 용어- 영화, 드라마 혹은 만화에서 쓰이는 용어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표현이 많다. 주로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사회생활이나 사랑에 관해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사랑이란 감정은 매크로에 가깝다 생각했다. 일말의 호감이 존재한다면 전개되는 방법이 대부분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적 있는 레퍼토리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설렘에 따라 관계의 발전도가 달라진다 생각했다. 한데 이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사랑은 단순하지 않았다. 흔히들 사랑이 싹트는 분위기를 말할 때, 봄이 가져오는 따뜻한 날에 피어난 꽃이 가져다주는 상큼한, 여름에 피서를 떠나거나 더위 속에서 찰나의 시원함을 마주할 때의, 가을이 되어 쌀쌀한 날씨에 옆구리가 시리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할 때 생겨나는, 겨울에 추위를 맞아 혼자서 떨고 있을 때 느껴지는 온기가 가져오는 이런 분위기를 떠올리고 그 외에도 이런 게 설레더라-하는 표준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연찮게 마주친 인연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이었고 알고 지낸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서로에 대한 추억이 깊지도 심지어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깊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많은 추억을 쌓아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희한하게도 별다른 이유 없이 생각날 때가 많다. 대체 왜. 사랑이 떠오르기 위해 필요한 게 없다는 것은 잔혹한 일이다. 일상에 녹아들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 때문에 그렇지도 않고 함께 했던 특별한 추억들이 있어서도 아니고 관련된 무언가를 봐서도 아니라 그냥 단순히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생각은 어떻게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랑을 했다. 전혀 상상치 못하게 들어온 소개팅 제안, 여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며 막무가내로 성사시킨 자리에 나가게 됐다. 당연히 카페에서 만나서 얘기 조금 하고 시작하겠지 하며 보내온 약속 장소로 향했더니 웬 술집이었다. 첫 만남부터 바로 술집인 것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먼저 들어가기가 애매해서 잠시 기다렸더니 옆에서 누군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부르듯이 나에게 달려와 어깨동무를 했다. 키차이 탓에 어깨동무라기보다는 팔을 잡은 모양이었지만 매우 놀라웠다. 처음 보는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요즘 유행하는 mbti를 인용해 enfp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술집에 들어섰다. 전혀 어색한 분위기가 없었고 오래 알았던 친구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신나게 마시고 놀았다. 다음 날 일어나서 별다른 기억은 없었고 그렇게 놀다가 들어온 것이 소개팅인지 그냥 친구 만나서 논건지 하는 생각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일어났으면 해장이나 하자는 제안에 같이 짬뽕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고 자연스레 근처의 중국집에서 만났다. 편안한 분위기로 취미, 관심사 같은 것은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쓸데없는 얘기나 재밌는 썰을 풀면서 웃고 떠들며 짬뽕을 먹고 나오는데 자연스레 손을 잡아주더라. 되게 스스럼없는 친구라는 생각만 하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놀라 손을 놓았다. 이제 와서 부끄러운 척이냐며 아무렇지 않게 '손'하며 뻔뻔한 표정으로 말하는 너는 정말 이상했다. 손에 땀이 나서 좀 그렇다는 핑계로 대충 주변의 아무 카페로 들어갔다. 한데 또 웃기게 카페에 앉아서 평범한 소개팅 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갑자기 이렇게 하니까 오히려 더욱 어색한 나머지 완전 친구가 돼버린 것 같아서 그냥 평범한 얘기를 꺼내려했지만 이런 대화를 원한 것 같아서 하고 있었는데 역시 이런 게 더 좋아 보인다며 카페에서 나와 이른 저녁에 또 술을 마시러 갔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예상치 못한 일들에 기운이 빠져서일까, 다음날 나는 취했었고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려던 찰나에 이미 여자친구인 듯이 저장되어 있는 전화가 왔다. 또 해장이나 하러 가자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얼렁뚱땅 시작된 우리의 연애는 끝도 정말 허무했다. 사귀는 와중에도 평범한 데이트보다는 친구처럼 노는 경우가 많았고 여자인 네가 더욱 적극적이었으며 남자인 내가 연애감정을 바랐다. 그러다 먼저 이별을 꺼낸 너는 별다른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사라졌다. 마치 나타났던 것처럼. 이별이 아프지 않았다. 깊은 사랑이라 생각지도 않았고 연인 같은 추억도 없으니 금방 잊겠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냥 자꾸 생각이 난다. 그 흔한 달콤한 말들과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사진을 찍고 손 잡고 산책하는 평범한 연애의 클리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관계였지만 마음하나는 더욱 진짜였나 보다. 결국 클리셰는 클리셰였다. 여느 이별처럼 마음이 아프고 잊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다. 이런 울림을 다른 평범한 사랑으로 또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