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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와 기분이 좋다. 옛 추억에 빠져볼겸 이전에 살던 동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봤더니, 하나 둘 아는 길과 건물들, 그리고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이 곳에서는 이런 일이, 저곳에서는 저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것이 마치 곳곳에 영화필름을 틀어놓은 것처럼 매 순간이 보여졌다. 수많은 사람이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이곳이 내가 살아왔던 곳이라는 노스텔지아를 느끼게 해줬다. 세상은 나에게서 시간을 가져가 나를 위해 한없이 밝았던 기억들만 가득차있고 불행하다 느꼈던 감정은 모두 사라지게 해줬다. 그렇게 미화된 기억들로 가득찬 이곳에서 그 순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시간을 지내게 한 그 시작점에 도착했고 그곳은 여전히 밝았다.
지나온 수많은 추억을 보면서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밝고 선명하게 흘러나오는 우아한 선율 같이 자연스레 흐르는 기억, 내가 이곳을 잊지 못하게 해주는 너라는 존재,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도 못놓고 있는 가려는 이를 꼭 붙잡으려는 자존심 같은 건 내려놓은 미련한 뻘판 같은 찌질한 내가 아직까지도 이곳에 남아서 나를 멈춰세우고 깊고 깊은 생각에 빠져 눈을 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떨어트렸다. 분명히 아름다웠고 찬란했던 기억만으로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왜 고작 이런 추억의 장소 하나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걸까. 더 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고 행복이란 단어에 끌어당겨진 듯이 늘 웃음을 떨어트리지 못했고 너와의 시간에 후회도 없으며 그렇기에 끝에서 미련도 없으리란 생각으로 서서히 깊고 또 깊게 묻었던 기억들인데 이 장소는 나에게 이 시간을, 이 감정을 다시 마주하라는 듯이 그 모든 추억을 내 앞에서 틀어놓고 있다. 아직도 네가 그리운 걸까 생각했지만 아닐것이다.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냥 그 시간이 그리워서 인가 생각했지만 그것또한 아닐테지, 대체 이 곳은 왜, 그리고 나는 대체 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여기서 발걸음을 더이상 옮기지 못할까. 아마 지금 여기 내가 발을 들이는 순간 시작된 영화의 전편이 너무 감동적일 것임을 알기에 꼭 다보고 움직이고 싶은 것일까 하는 생각에 겨우 발을 옮겨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 앉아있던 벤치에 가서 다시 앉았다. 마치 5년 전의 그 때처럼.
온몸을 떨면서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그것마저 설레이는 마음으로 앉아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저 멀리서 너가 오는 것을 봤지만 애써 담담한 척을 하기 위해서 인사도 못하고 눈을 감고 떨리는 손을 서로 꼭 붙잡고 돌아서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와서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안녕'하고 인사를 건내는 너를 보는 순간, 떨리지 않기 위해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챙겨먹은 우황청심환과 진정하기 위해 30분전부터 와서 너에게 무어라 고백할지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하던 모든 기억을 잊고 단 한 가지 감정이 남았고 그 감정을 멋없이 딱 한 단어를 뱉어버렸다. '사랑해' 정말 하루같은 1초가 흐르고 당황한 그녀보다 더욱 당황한 나는 그 이후의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어버렸다. 그런 멋없는 멘트여도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그녀도 용기내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한 마디에 얼어버린 내 몸은 본능적으로 봄을 느껴 사르르 녹아내렸고 털썩 주저앉으며 준비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멋없게 고백한 것이 창피스러워 얼굴을 감싸며 눈을 못마주치는 내게 귀가 빨개졌다고 놀리면서 웃던 그 웃음소리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귓 속을 맴돌고 있다. 정말 드라마틱한 사랑을 하겠지, 다른 주변 애들과는 다르게 마치 만화처럼, 멜로영화처럼, 로맨스적인 요소를 모으고 모아 한 세기에 남을 애틋한 사랑을 할거라는 우리는 다를 것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는 누구나 그렇듯 지나보면 정말 평범한 연애였다. 그렇게 평범하게 사랑하고 때론 미워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놀고 행복해하며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고 후회를 미루며 지내던 우리는 어느날 뒤섞인 수많은 감정으로 사랑이라는 마음을 가렸다. 사랑한다는 표현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보고싶다는 말보다 피곤하다는 말이, 행복하단 말보다 우울하다는 말이 늘었다. 점점 지치고 지쳐도 이별을 말하지 않다가 어느 날 오랜만에 깊게 마주친 단 1초의 눈맞춤에 아, 사랑이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미안한 것은 없지만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그보다 먼저 눈물이 나왔다. 이미 느꼈던 걸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말 없이 똑같이 눈물을 흘리는 네 모습에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둘이 한바탕 울었는지 웃었는지 모를 감정을 남긴체 걸었고 끝에서 늘 하던 내일 봐, 사랑해, 조심해서 들어가가 아니라 잘지내, 고마웠어 라는 말을 건냈고 그 끝말은 우리의 시작을 알려줬던 너의 '안녕' 한 마디였다.
2년간의 짧았던 시간은 지금까지 6년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길었던 사랑이지만 짧은 미안함으로 남은 너를 남겨두고 이제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 한다. 또다시 추억과 시간과 감정을 묻어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