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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Nov 11. 2019

내겐 너무 예쁜 피아노 선생님

열 살 땐가,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았다. 동네에 피아노 학원도 있었는데 엄마는 나에게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큰맘 먹고 투자를 했던 것 같다. 나의 선생님은 이대 음대에 다니던 아주 예쁜 대학생 언니였다. 왜 너무 예쁜 사람이랑 단둘이 있으면 조금 무섭지 않나?(나만 그런가..) 나는 너무나 예쁘고 완벽해 보이는 피아노 선생님의 첫인상이 조금 무서웠다.


마른 몸에 작고 하얀 얼굴, 긴 생머리는 언제나 끝이 도르르 말려 있었다. 그녀는 늘 몸에 딱 맞는 원피스에 또각또각 뾰족구두 소리를 내며 우리 집 현관에 등장했다. 못생기고 어린 나는 선생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엄격했다. 손의 모양이 좋지 않으면 손등을 찰싹 맞았던 게 기억난다. 물론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런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 노트에 선생님이 그려놓은 수많은 사과 개수만큼 연습을 하고 색칠해야 했지만 피아노에 흥미를 잃은 나는 자주 숙제를 완수하지 못했다. 어쩌다 거짓말로 색칠을 해 놓으면 단번에 들통이 났다. 그럴 땐 정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것이다. 선생님이 "또 숙제 안 했구나."하고 한숨을 푹 내쉬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피아노 선생님이 오는 날이 싫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피아노를 그만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이란 원래 싫증을 내기 마련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어느 날, 피아노 수업을 하는 중에 엄마가 들어왔다. 보통 엄마는 수업 전에 인사만 하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또 혼나는 중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내가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고 나면 엄마한테 2차로 또 혼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엄마가,


"저런 싸가지 없는..."


자기가 뭔데 우리 딸을 주눅 들게 하냐며 당장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자고 했다. 생기기만 이쁘장해가지고 아주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이었다며, 처음엔 상냥한 척하더니 사람을 잘못 봤다며 엄청 흉을 보았다. 나는 엄마가 그러는 게 너무 신이 나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성토하며 한을 풀었다. 선생님을 해고한 이후로도 종종 농담처럼 우리는 그녀의 흉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너무 재미있고 신이 났다.


사실 어린 선생님이 아이를 대하는 방법이 조금 서툴었을지 몰라도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충 해도 티 안날 수업이지만 열의있게 가르치던 성실한 선생님이었다. 아마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상스러운 표현까지 쓰며 내 앞에서 화를 냈던 진짜 이유. 아직 어리지만 나에게도 아이가 있으니 알 것 같다. 그날 아마 엄마는 선생님 옆에 쭈글하게 앉아 울상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이런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서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동자가 흔들리게 되는 걸까. 엄마가 떠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 부단히 애를 쓰지만 늘 증거가 부족한 이 세상 속에서 외로울 때마다, 턱없이 작고 약한 내가 한심할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면 왈칵 눈물이 났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내가 이 한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게 귀하고 빛나는 존재라는 게 너무 벅차서, 고마워서, 그리고 이상하게 슬퍼서.


나는 점점 엄마가 되어가고 앞으로도 때때로 내 엄마와의 순간을 다시 이해하게 되겠지.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고백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써야지. 그 마음이라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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