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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Nov 12. 2019

나는 페미니스트다.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1)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까? 만약 아니라면,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거나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일 거다.


단란한 가족의 풍경을 싱크대 앞에서 뒤돌아볼 때, 푸석한 얼굴로 유모차를 밀며 시원한 향이 나는 회사원들 사이를 지나갈 때, 분주한 세상 속에 나만 여기에 고여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세상이 나를 단단히 속여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청년일 때 나는 성차별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기억이 없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도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온 엄마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젊은 여성이 있다. 그게 나였다. 아이와 함께 있는 엄마를 보면 이상하게 피하고 싶었다. 내 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보다는 왜 저렇게 시끄럽고 경우가 없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저렇게'가 뭔지도 전혀 모르면서 잘난 체를 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이 여자라고 기회를 주지 않는 것도 아닌데, 물론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그만큼 더 노력해야지, 왜 노력도 하지 않고 남편이 가져다주는 돈으로 일도 안 하고 저렇게 한가하게 사는 거지? 그런 여자들 때문에 우리도 같이 욕먹는 거잖아.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잖아. 여자들 결혼하면 다 저렇게 안일해진다고, 그래서 나도 오해받잖아, 당신들 때문에. 좀 그렇게 나와있지 좀 말라고.'


내가 뒤틀린 사람이었을까? 부끄러운 내 과거의 마음의 소리는 진짜 나만 하는 생각이었나?


세상은 젊은 여성들을 속인다. 노력하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물론 안 되는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 노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동시에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에게 단어를 가르쳐주다 보니, 젊은 성인 여성을 지칭하는 적당한 말이 없다. 남자는 형보다 나이가 많으면 아저씨라고 하면 되는데, 누나와 아줌마 사이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가씨는 아이가 부를 수 있는 말이 아니니까. 왜 적당한 말이 없을지 생각해보다 없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 따로 없는 거였다. 아저씨는 계속 아저씨고, 아가씨는 아줌마가 되는 거구나.


대부분의 여자가 아줌마라고 불리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지 젊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일터에서 만난 여성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 보여도 아줌마라고 불리진 않으니까. 나는 시장 상인으로부터, 아파트 관리인으로부터, 아이와 함께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종종 아줌마라는 호칭을 듣는다. 그 말은 내가 현재 주류의 삶으로부터 밀려나 있음을 확인시킨다.


나는 남들보다 길게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도 돌아갈 안정된 직장이 있는 복 받은 여자다. 내가 교사라고 하면 열에 여덟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야." 그래서 난 이런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 있는 내가 투정을 하면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뭐가 되나, 배부른 소리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유행을 하고 영화까지 개봉을 하자 공감과 이해의 목소리와 함께  "김지영 정도면 진짜 괜찮은 거다."라는 성토도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빈곤하지도 않고, 일 하러 오라는 회사도 있고, 자상하고 헌신적인 남편까지 있는 다 가진 여자가 뭐가 힘들어서 우울증에 걸리냐고 했다. 특히 비슷한 연령의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김지영도 힘든데 당신은 얼마나 힘들겠냐고. 나에게 쉽지 않은 이 시간이 당신에게는 얼마나 어렵겠냐고. 배부른 소리를 먼저 해야 덜 배부른 사람 소리도 나오는 것 아니겠냐고.


누가 더 힘드냐, 덜 힘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불편함이 있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바꿀 수 있다면 바꿔보고, 어렵다면 더 생각해보자. 괜찮다고 말하기 전에 진짜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한번 더 물어보자. 일단은, 나를 위해서.


그래서 용기를 내 말한다.

86년생 김다혜, 나는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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