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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Nov 13. 2019

남자를 상상해보기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2)

"여보, 나 오늘 영화 볼 거야."

"조커 아직 하나? 그거 재밋다던데."

"82년생 김지영 보려고. 아니다, 다음에 같이 볼까?"

"아니야, 나는 별로."


소설은 직접 구입해서 읽었던 남편이 왜 영화엔 흥미를 보이지 않는지 이상했다. 물론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퇴근한 남편이 영화가 어땠냐고 물어 아주 좋았다고 했다. 그러자,


"그거 남 욕하는 영화 아니야?"


농담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왜 나와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나라도 두려웠을 것 같다. 소설이야 따로 읽으면 되지만,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원망 섞인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귀가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남편의 걱정과 달리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남자만의 어려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젠더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방어적인 남자들의 의견을 자주 접한다. 여성이라서 겪는 불편함이나 부당함에 문제를 제기하면 되려 창피를 주려 하는 남자들, 성폭력의 불안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남자들. 그런 남자들을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이상한 '부류'로 취급하고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니까.'라고 위안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 역시 그들이 여자를 바라보는 몰이해적 태도와 똑같은 것이었다.


영화 속 대현은 그런 '부류'의 남자로 그려지진 않았지만 남자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대변했던 것 같다. 그 남자는 너무나도 외로워 보였다. 지영과 달리 대현의 입장은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았고 한 마디의 위로도 받지 못했다. 그와 가장 비슷한 입장에 있을 동년배의 직장동료들도 서로 터놓고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신의 감정은커녕 상황조차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존재고 아내는 자신이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하고 두려운 사람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공감과 지지를 거의 받아본 적이 없지 않을까? 마치 제 살을 내어줄 듯한 딸의 인생에 대한 지영 엄마의 지지.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까발리며 자조 섞인 농담을 나누는 어린이집 엄마들. 몰카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다 피식 웃으며 나누는 연대의 눈빛들. 남자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을까?


만약 내가 페미니즘의 '페'자만 들어도 심기가 불편한 한 남자라면 어떨까, 그 이유를 상상해보았다.


'세상 사는 게 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남자라서 겪어야 하는 억울한 일도 얼마나 많은데. 남자들은 그런 것들 하나하나 들먹이며 힘들다고 말하지 않잖아. 말하면 사내 새끼가 약해 빠져 갖고 정신 못 차린다는 소리나 듣지. 그런데 여자들은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 너무 많아.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혼자 예민해서는 남자들을 범죄자 취급할 땐 정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고. '


대충 이런 마음 아닐까? 상상해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 입장은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다른 입장을 공감해줄 여유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그 입장이 마치 나를 공격하는 듯 보인다면 더더욱 반감이 들 것이다. 이미 사나워진 감정의 벽은 논리적인 설명이 절대 뚫지 못한다.


사실 대부분의 남성들도 평등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남자라고 가부장적 사회가 마냥 편하고 좋기만 한건 아니니까. '남자 새끼가', '사내답게', '계집애같이' 이런 표현들에 억압당한 성장기에는 상처가 없겠는가. '가장으로서', '아들 노릇' 이런 표현들에 묶여 사는 성실한 남자들은 또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대부분의 젠더 문제는 남자와 여자의 대립이 절대로 아니다. 여자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남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강한 대화의 장이 만들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영화 속 대현이 당신이 아픈 게 나 때문인 것 같다며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나는 가장 많이 울었다. 대현이 말끔한 정장과 애쓴 웃음 안에 숨기고 있었던 혼자만의 눈물. 나의 남편에게도 그런 눈물이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거창하게 이 시대의 남성과 여성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나에게 그럴 자격도 없고. 기울어진 세상에 사는 나의 남편과 아들에게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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