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날 Dec 02. 2019

너는 그 밤의 노들섬을 기억하는지

노들섬에 갔다. 한강대교를 가로지르는 멋진 육교, 잘 정비된 산책로, 사선의 햇살이 드리우는 서가, 360도 파노라마 한강뷰까지. 여기가 정말 노들섬이란 말인가! 이상할 정도로 근사했다.  기억 속 노들섬은 이런 곳이 아니다.


열여덟 살의 초겨울이었다. 그땐 노들섬에 서는 버스가 당연히 없었으니 노량진 쪽에서 걸어서 갔다. 아니, 걷다보니 노들섬이 나왔다는 편이 맞겠다. 반짝이는 밤, 내 손에는 캔맥주가 든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고 보라의 주머니 속엔 말보로 레드가 들어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나무와 풀들을 지나 검은 물과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죽더라도 한참이 지나 발견될 것 같은 그곳에 숨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보라를 자주 생각한다. 어떤 시기 가깝게 지내다가 멀어진 친구는 꽤 많지만, 보라에 대한 기억은 특별하다. 보라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보라의 말, 보라의 사진, 보라의 취향, 보라의 음악, 보라의 우울, 보라의 담배, 보라의.... 거의 모든 걸 동경했다.


나는 싱클레어, 보라는 데미안이었다. 낯간지러운 비유지만 이보다 적절한 대상은 없는 듯하다. 보라의 모든 것이 멋져 보일수록 나는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세상을 다 이해하는 듯, 조금은 체념듯한 그 아이의 옆모습을 보며 성적과 외모 따위에 대한 하찮은 내 고민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수치심은 나에게 꼭 한 번은 필요것 같다.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앞에 나와있는 것들 너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으니까. 그걸 잘 알고 있는 보라 옆에서 나는 매일 새로운 세상을 엿보았다. 해진 답으로 이루어진 나의 세상은 자유로운 보라 옆에서 비로소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 보라와 연락이 뜸해지고 친구로부터 소식을 듣는 사이가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라에게 내가 어떤 친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보라는 닿을 수 없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간극을 따라가다 보니 성장했지만, 계속 따르기엔 사실 힘이 들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함께 지낼 수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그럴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나의 온갖 것들이 다 부끄럽던 때였으니까. 그리고 보라는 자꾸만 그런 나를 비춰보게 만드는 존재였으니까. 사실 보라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는데 나는 그 아이 옆의 나에게 스스로 많은 것을 바라느라 지쳤던 것이다.


나보다 훨씬 더 외로웠을 보라. 그 섬세한 취향과 호기심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다만 옆에 있어주길 바랐을 텐데. 다 지난 시간이지만 옆에 잠시 앉아서 잘 웃던 내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길 바란다. 내가 보라의 오랜 친구가 되지 못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에게 보라가 너무도 필수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보낸 그 필수적인 시간들은, 돌아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는 그 밤의 노들섬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의 보라, 외롭지 않길. 자주 웃으며 지내길 바란다.





*보라는 가명임.

작가의 이전글 남자를 상상해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