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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Oct 16. 2018

엄마의 두번째 기일

엄마의 두번째 기일.

이 날을 이렇게 보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한 마디로 재앙이었다. 엄마 생각을 할 틈이 없어서 눈물 한 방울 없이 지나갔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니 슬픔 없는 기일이라니 그것도 아쉽다.


문제의 시작은 큰아버지.

기일이 평일이라 어차피 다들 퇴근하고 들러야 하니 제사 음식은 몽땅 주문해서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일찍 가서 납골당에도 다녀오고 아빠랑 밥도 먹고 그러려 했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오신다고 했다.


큰아버지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하자면 이 시대 마지막 유교주의자로, 우리나라의 수도는 안동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며 조상을 위한 일로 일상을 사시는 분이다. 물론 큰아버지는 나름의 역할과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고 계시다는 면에서 존경할 만 한 분이지만 문제는 그 신념이 주변 사람을 지나치게 피곤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신념은 당연한 말이지만 극도로 가부장적이다.


큰아버지가 엄마의 제사에 오신다는 뜻은, 그냥 그 분의 방문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오시니 줄줄이 아버지의 형제, 자매, 배우자 총 12명의 손님이 자의무, 타의백으로 우리집에 끌려 오셨다. 특히 이 집안의 며느리인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는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동서의 제사를 치르기 위한 일손으로 방문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안그래도 명절, 부모제사만 해도 머리가 아픈 와중에 동서라니.)


제사 음식을 주문했다가는 또 어떤 비난을 들을지 몰라 주문을 취소하고 전날부터 나물에 떡에 뭐 이런저런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당일날은 일손으로 오신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의 가르침아래 눈코뜰 새 없었다. 정작 나는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제사상 앞에 절도 못했다.


엄마의 얼굴도 모르는 오빠의 아내는 퇴근 후 들어서자마자 절을 하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설겆이를 하다 나와 함께 부엌에 엉거주춤 서서 대야에 담긴 비빔밥을 퍼먹었고, 같은 시각 거실에는 남자들이 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앞에 놓고 음복과 식사를 했다.


가까운 곳도 아니고 춘천까지 와주신 그 많은 손님들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도 컸다. 큰아버지 또한 엄마의 두번째 제사에 아프신 몸을 이끌고 친히 오셔서 정성을 보이려는  마음이셨다. 살아계실때 시댁 일을 살뜰히 챙겼던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곳에 안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곳엔 귀찮음과 불편함과 불평등함과 허탈함이 있었다. 문제라면 왜곡된 허울만 남은 문화라고 해야 할까.


그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너무나 뻔한 말이 될 것이므로. 그저 우리 세대가 이 문화를 경험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길 바란다.

그 날을 조용하고 의미있게 보내고 싶었던 우리 가족은 갑작스런 손님들을 치르느라 혼이 나간 상태로 겨우겨우 운전을 해서 각자의 집에 돌아왔다. 아빠는 혼자 사는 집에 지나치게 많은 음식들이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며 이걸 다 어쩌나... 했다.

나는 까만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엄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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