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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Dec 31. 2022

생각 없이 꺼낸 말이 미치는 결과

나 연봉 낮춰서 왔어, 한 직원이 말했다. 궁금하지 않았다. 근로계약서에 '연봉 공유 시 퇴사 사유' 항목이 있었고 모두 동의하에 입사했을 테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연봉 얘기가 나오자 서로 눈치 보며 솔직히 우리 연봉은 말이 안 된다며 불만을 조금씩 꺼냈다. 얼마나 낮길래 저러지, 혹시 내 연봉이 제일 낮으면 어떡하지.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쓸데없는 생각과 불필요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묻고 싶지만 물으면 내 연봉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은 척 외면했다. 다른 주제로 넘어갔으면 했는데,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 시선이 몰렸다. 혹시 모를 방패로 나 역시 연봉을 낮췄다고 말했다. 원래라면 연봉 높은 곳에 갈 수 있었는데 그냥 여기 왔다는 사람들 말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이 정도인 사람이 될 것 같았달까. 이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기준점은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순간, 능력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연봉 얘기를 꺼낸 직원은 내 대답이 끝나자 술잔으로 시선을 옮기며 '그러니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다. 자리가 불편해졌다. 열심히 하고 하지 않고는 각자가 선택하는 건데 왜 저런 말을 할까. 이해되지 않았다. 그 뒤로 그 사람이 눈에 잘 보였다. 노는 모습이. 짜증 났지만, 너는 너 나는 나라며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내 월급의 차이는 많지 않았고 늘 야근하는 나와 달리 매일 게임에 칼퇴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억울하기도 했다. 연봉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불평불만 없이 내 일만 했을 텐데, 괜히 연봉 협상을 잘못한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난 내 나이, 내 직업의 평균 연봉을 모른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내가 적게 받는 건지, 많이 받는 건지도 잘 모른다. 그렇기에 연봉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조심스럽다. 내 능력의 가치를 얼마나 측정해야 하는지 어려우니까 늘 위축된달까.


연봉 얘기를 꺼낸 직원을 A라 부르겠다. A는 자기 말이 맞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듯 일을 미루고 몰래 게임하거나 담배를 피우러 갔다. 협업하는 일에서도 귀찮다는 말을 자주 했다. 당연히 요청할 수 있는 일에도 눈치 보였다. 말해도 제대로 하지 않을 거 그냥 마음 편히 내가 해야겠다며 포기한 적도 많았다. A는 사회생활 경험이 있었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우친 듯했다. 다른 직원들은 몰라도 팀장, 이사, 대표 앞에서는 잘 보이려 애썼다. 그러다 팀장이 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A 세상이 됐다. 팀장이 없어도 잘 돌아간다, 우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다, 현장은 현장 사람이 해야 한다 등. 인사 담당자에게 의견을 전하면서 이전보다 더 마음 편히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A와 나를 비교했고 의심 없이 열심히 했던 일에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이렇게,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이 사이에서 묵묵하게 웃으며 술잔을 부딪혀주는 직원이 있었다. 이 사람을 B라고 부르겠다. B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성격이다. 어느 날 내게 조용히 말했다. 대표가 실수로 전 직원 월급을 자기한테 보냈다고.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이미 A한테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다른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다. B에게 본인의 연봉에 만족하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다른 직원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건가. 직원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여부를 떠나 여유로워 보였다. 다른 직원들 연봉을 알게 된 자의 여유인지, 사람들 말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의 여유인지 궁금했다. 그를 눈여겨봤다. 듣는 귀는 하나지만 흘리는 귀는 여러 개 인 듯싶었다. 혼내도 허허, 즐거워도 허허, 힘든 일엔 덤덤, 슬픈 일에도 덤덤. 늘 멍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의 표정인 건가. B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사회생활 해봤고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왜 '너는 너, 나는 나'가 잘 되지 않을까.


B와 나의 차이점은 뭘까.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의 차이인가. '어차피 사람은 다 똑같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편해' VS '사람은 똑같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나를 위해 속 편하게 사는 것과 나를 위해 마음 불편하게 사는 것의 차이인가. 현실이 기대와 달랐을 땐 실망스럽긴 하지만 기대하는 일을 마음이 불편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생각해 보면 상대의 말실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적도 많았다. 그 사람이 싫어서 회사 가기 싫었고 불면증까지 생겼기면서.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넘기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만 힘든 건데. B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져도 그러려니 하면서 그 사람을 응원하고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A의 행동을 안 좋게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솔직하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계산 없이 행동하는 B의 태도가 멋있었다. 남의 시선을 잘 의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의식해서 이런 행동을 한 걸 수도 있지만 B가 되어보지 않은 이상 어느 게 진실인지 모른다. 난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B의 솔직함이 좋아 보였다. 연봉얘기에도 그러려니 하고 내 일만 꿋꿋하게 하는, 그 어떤 부정적인 영향도 받지 않은 성격 말이다. A는 주변 분위기를 흐렸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태도는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A가 싫지는 않다. 우리 모두 잘 살고 싶고 상처를 싫어하는 사람이란 생각 때문인지. 그나저나 내게 가치관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보다. 말 한마디에 휩쓸리는 거 보니. 아닌가. 나도 본능에 충실한 사람인 건가. 손해 보기 싫고 상처받기 싫은 그냥 평범한 사람. 뭐가 됐든 받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억지로 받는 일은 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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